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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온 날

by 초동급부 Mar 3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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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철

오늘 너에게 전화를 했었었어.
이병장? 맞니? 그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너 근무 나갔다고 저녁에 하라고 하더라구. 근데 목소리가 퉁명스럽고 떨떠름한 것이 너를 많이 갈구는 사람인 듯싶던데. 전화 괜히 한 건 아닌지 또 생각했지. 오래 할려구 전화한 거 아니었는데, 그냥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끊으려고 한 건데 아쉽게도 목소리도 못 듣고 끊었구나. 

첫눈이 온다고 전화한 거였어. 서울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고. 많이 내려서 쌓일 정도가 되었다구 말야. 그 말을 하고 안부를 묻고 끊을려고 한 거였어. 정말 짧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할 수 없지 뭐. 근데 오늘 첫눈 치고는 정말 많이 왔어. 그래두 눈이 오니까 마음이 이상한 거 있지. 좋다기 보단 더 서글퍼진다고나 할까. 나이 먹을수록 왜 이렇게 청승맞아지는지 원...

우울해. 그냥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기운이 나질 않아.
답답하구, 자꾸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한마디로 기분이 참 묘해. 속 시원히 털어놓을 데도 없고.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사람도 없어... 이럴 때 너라도 곁에 있으면 참 좋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정말 요즘 같아선 세상 살기 딱 싫어. 그렇다고 뭐 어찌해보겠다는 건 아니지만...

요즘 들어 여의도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전경들이 참 많아. 
열명 넘게 줄을 서서 방패 하나씩 들고, 오늘도 퇴근길에 서강대교를 넘어가는데 줄지어 서 있더라고. 날씨도 추운데, 참 많이 안돼 보이더라 그리고는 네 생각이 났어. 갑자기 가슴 한켠이 시려오는 게 코도 시큰해지구... 이상하게 길거리에 있는 전경들만 봐도 네 생각이 난다. 넌 더 추운 곳에 훨씬 더 오래 서 있을 텐데, 얼마나 힘들까 하고. 게다가 서강대교 넘으면서(매일 지나긴 하지만) 바로 코 앞에 너네 집인데 하면서 고개를 떨군다. 

힘내... 항상 감기 조심하구. 그럼 또 편지 쓸게.

1998. 11. 19.

P. S. 오늘은 서울이 -7도였어. 참 전화는 4시쯤 했던 거 같다.
       네 생각 많이 나. 그래서 보고 싶어.


연재를 시작하기 전 아내의 편지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6권의 클리어 파일에 담았다.

오늘의 글을 위해 나름의 선별작업을 거치던 중 이 편지를 발견했다. 지난 연재의 편지가 11월 24일 자였기에 엄청나게 지각을 한 녀석이지만, 지각생 덕분에 내 선택의 고민을 멈출 수 있었다.


쫄따구 이병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그녀의 첫 번째 전화... 이후로 다시 소대에 전화를 거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은경이는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곳에 나는 없었고 잠시나마 첫눈이 안겨준 설렘과 용기가 서글픔으로 바뀌어 버린 것만 같다.


나와 유사한 처지 비슷한 나이의 전경들을 보고 내가 생각나고 걱정되어 가슴 한켠이 시려오고 코도 시큰해졌다는 그녀...


당시 그녀는 직장이 여의도였고 집도 멀지 않았다. 

그리고 서강대교를 넘기만 하면 우리 집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곳에도 나는 없었다. 큰맘 먹고 전화했지만 목소리도 듣지 못한 날, 처음 내린 눈을 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많은 사람들 중에 홀로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내 아내가 너무도 가여운 첫눈 온 날이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새벽...

내 가슴 한켠도 아려오고 코도 시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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