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철이에게...
졸린 눈을 억지로 떠가며 지금 너한테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야.
생색낼려구 하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졸음을 참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생각 끝에 너한테 편지 쓰는 거다. 오늘은 무지 피곤해서 편지 쓰는 거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잠자려고 했는데 가만 누워서 생각해 보니까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억지로 몸을 추슬러가며 펜을 잡아보지만 오늘따라 글씨도 이상하고 미치겠다.
그냥 잠이나 잘걸 그랬나? 아냐 그래두 편지는 써야지. 너 그거 아니?
너한테 편지 쓰는 게 나의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다음부턴 나에게 일기란 게 없어졌다는 걸. 다른 게 일기가 아니라 바로 너한테 편지 쓰는 게 나의 하루 일과 보고요 일기라는 걸 말야. 물론 그렇다고 네게 모든 걸 다 털어놓지는 못하지만... 그래두 내가 쓴 편지는 일기나 다름없어. 하루 종일 뭘 했으며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어떤 거고 기타 등등... 말이다.
근데, 내가 졸린 이유를 알았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어.
우리 회사 점심시간 몇 시인지 알지? 12시부터 1시까지인데, 난 밥숟가락 놓는 순간부터 배고팠어. 아니 항상 그래. 그렇다고 밥은 싫고 군것질 같은 것만 하게 되는 데 요즘은 바빠서 군것질할 시간도 없다. 암튼 12시에 밥 먹구 퇴근시간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어. 집에 와서 너무 배가 고파서 팝콘 1봉지를 전자렌지에 튀겨먹고, 빵 2조각을 토스트 해 먹고, 엄마가 끓여주신 맛있는 떡국(올해 처음 먹어본다. 1월 1일 날 했었는데 미용실 가는 바람에 못 먹었어)을 한 그릇씩이나 먹구 우유 한잔 마셨거든. 가만 보면 참 돼지야. 어쩔 때 보면 안 먹는 듯하는데 많이 먹잖아. 것두 저녁에. 그러니 살이 안 찔래야 안 찔 수가 없지. 여하튼 많이 먹은 관계로 잠이 오는 걸 모르고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나 봐. 한심한 은경이다. 근데 이렇게 너한테 편지 쓰고 있어도 왜 잠이 안 깨지? 어휴, 어휴. 졸려. 몰라 그냥 잘래.
참, 그전부터 물어볼려구 했는데 잊어버렸었어.
너 처음 면회 갔을 때 내가 너 준 사탕 다 먹었어? 갑자기 그게 궁금하다.
아무도 안 주고 너 혼자 먹었겠지? 근데 그거 언제 다 먹었어? 다 먹으면 또 사주기로 해 놓구선...
다음 면회 갈 때 사갈게.(좋아하면... 사탕 같은 거 싫어하는데 괜히 좋은 척한 거 아냐? 괜찮아. 난 그저 솔직한 게 좋아.)
은경이는 졸려서 이만 잘래. 근데 이렇게 많이 먹구 금방 자면 돼지되는데... 어쩌지?
1999. 1. 18.
P. S. 삼철아! 보고 싶다. 빨랑 나와라. 응?
은경이 혼자 외롭고 쓸쓸하다는 거 너두 알지?
언제쯤 나와 하루 종일 놀아줄 수 있는 거야? 언제쯤...
가만 보면 참 돼지가 아니라 그냥 봐도 참 돼지다.
반백년을 숨쉬기 외에는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던 아내가 요즘 PT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가뜩이나 식탐 많은 그녀가 더 자주 먹는다. 반면에 나는 덜 먹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역대급 더위에 시달리는 여름, 아내는 쨍한 맥주 한 잔으로 매일밤 나를 유혹한다.
넘어가지 않을 수도 없다. 삐치기 일쑤이니 말이다. 요즘 난 아내를 돼지라 부르고 있다.
아내는 옥수수와 복숭아를 좋아한다.
택배아저씨께 미안할 정도로 그것들이 교대로 현관문 앞에 놓여 있다. 참, 새롭게 추가된 친구도 있다. 단호박... 옥귀(옥수수 귀신)이라고 불린 지는 오래전이고 최근 복지(복숭아 돼지)가 추가되었다.
아내는 돼지라고 부르자 기분이 나쁘다며 예지(?)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지난 금요일은 오후에 와야 할 택배가 움직이지 않는다며, 옥수수를 먹기 위해 점심은 단호박으로 간단히 안배했는데 계획에 차질이 크다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그것은 이미 집에 와 있었고 아내는 옥수수를 삶느라 운동을 가지 않았다. 가장 싱싱할 때 삶아야 맛있다나 뭐래나...
자신의 일기와 같다는 27년 전의 편지들... 오늘 이 글은 유독 일기처럼 느껴진다.
내 예지의 먹기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