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꾸물거리는 날씨였는데 그래서 꼭 비나 눈이라도 왔으면 좋을 뻔했는데 그냥 그렇게 맑게 개어버렸어. 비라도 시원스럽게 내렸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비 구경한 지도 정말 오래됐는데. 실은 나는 눈보다 비가 더 좋거든. 내릴 때는 좋지만 오고 나면 금세 더럽혀지는 흰 눈보단 시원스럽게 내린 뒤에도 깨끗함을 보여주는 난 그런 비가 참 좋더라.
넌 비가 좋으니 눈이 좋으니? 그냥 궁금해서.
나 파마머리 풀었어. 근데 머릿결도 많이 상하고 그래서 예전 파마머리보다 더 맘에 안 드는 거 있지. 파마했다 풀어서 그런지 머리는 많이 자란 거 같은데 예전 머릿결 돌아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이. 다들 뭐라는 줄 알어? 빗자루래, 아니면 옥수수털, 머털도사. 이 정도만 갖고도 충분히 알 수 있겠지. 괜히 파마는 해서 좋지도 않은 머릿결을 더 나쁘게 만들고. 그래서 생각 중이야. 그냥 머리 길르지 말고 커트나 할까 하고. 어떡하면 좋을까. 근데 막상 자르려고 하니까 그동안 길러왔던 게 너무 아까워... 너두 아마 내 머리 보면 파마머리 때 보다 더 기절할걸.
근데, 이미지가 확 바뀌었데. 글쎄, 몇 사람 얘기만 듣고 확실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성숙해 보이고(내가 그렇게 어려 보였나?), 훨씬 여성스러워 보인대. 칭찬인 지 흉인 지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난 속상한 거 있지. 머리땜에...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3월 6일 날 면회 못 갈지도 몰라.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생각은 하고 있지 마. 가게 되면야 미리 연락하겠지만 못 가게 되면 전화도 못 해줄 텐데. 많이 바쁠 거래. 회사가. 꼭 남 얘기 하듯 하지? 내가 다니는 회사인데두. 전에두 그랬었잖아. 3월까진 바쁠 거라고. 작년에두 3월엔 쉬는 토요일 없이 일요일에도 출근했었대. 올해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긴 하는데 그래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애.
3월 8일부터 훈련이라고 했었지. 언제 끝나?
토요일에 못 갈 거 같으면 일요일에라두 가야지. 설마 일요일까지 정말 출근 할려구.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가게 되면 가기 며칠 전에 연락해야 하나? 설마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너랑 통화할 수 있겠지 뭐. 그때 물어보면 되겠구나.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거 아니니깐 섭섭해하지 말구. 넌 뭐 내가 간다 해도 별루 반갑지두 않잖아. 그저 소대에 있는 거 보다 나니까 면회실로 오는 거 아냐?
잘 지내구.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만날 때까지 몸 건강해.
1999. 2. 18.
P. S. 삼철아! @@ @@@ @@@. @@@ @@ @@ @@@
미안해. 그냥 불러 봤어.
말 많고 탈 많았던 그 빠마버리와의 작별을 고하고 머털도사로 복귀했다고 한다.
빠마머리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반면, 그녀를 성숙하고 여성스러워 보이게 해 주었다는 그 귀한 헤어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진정 그러한 모습으로 변모했다면 내 기억에 남았을 것으로 본다. 은경이는 성숙하고 여성스러워 보이기 어려운 얼굴이다. 성격은 더 그렇다.
그녀의 면회는 솔직히 나에게 반가움보다는 아픔이 더 큰 시간들이었다.
완벽한 타이밍으로 버스, 지하철, 시외버스, 택시를 탄다고 해도 왕복 6시간이 넘는 길이다. 시작의 시간들은 즐거울지 몰라도 끝의 시간들은 반드시 슬픔과 함께 해야 함을 나는 잘 안다. 오직 눈물만이 동행하는 그 먼 길을 혼자 가게 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은 정말 찢어지게 아팠고 이어지는 날들은 너무도 힘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의 면회에 대해서 반색하며 반가워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99년 3월 6일에 그녀와 내가 만났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서로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섭섭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매번 기대만큼 반기지 않는 나에 대한 투정이겠지만, 그녀의 말처럼 소대에 있는 시간보다 나은 시간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순간도 그립지 않았던 순간이 없는 여자친구를 보고 만질 수 있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인데도 난 걱정이 앞섰다.
이때의 내 감정들을 떠 올려 보고 깨달았다.
정확한 시작은 모르겠으나, 이때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넌 비가 좋으니? 눈이 좋으니?
난 네가 좋다.
(ㅈㄴ 낭만 있어! - 임창정 버전)
P. S. 첫 줄의 골뱅이들은 그녀가 편지에 썼다가 펜으로 덧칠해 지운 글자들이다. 어떤 말이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