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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May 08. 2024

할머니 장례식


“오매! 엄니 엄니~ 우리 엄니~”


늦은 밤, 건넌방에서 들리는 엄마의 울음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이후 집안이 분주해졌고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오셨으며 다음으로 여러 친인척·지인 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와글와글 북적북적 사람이 많고 이것저것 없던 도구들도 생겼고 무엇보다도 먹을게 엄청났다. 대여섯살 정도였던 난 보름달 빵을 원 없이 먹으며 또래의 사촌 형제들과 동네 친구 승*이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즐겁고 신나게 놀았다.


는 열아홉 살에 시집을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군대에 갔다.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와 살며 모진 시집살이와 함께 농사일을 다 하셨던 어머니, 옛날 머슴처럼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며 농사일 등을 돕던 일꾼이라 부르던 분이 계셨다. 어머니는 그 일꾼과 함께 항상 밖에서 일을 했다. 밖의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집안일을 하는 일꾼이었다. 마침내 3남 2녀라는 경이로운 패밀리를 완성하였으나 아기가 늦어 할머니로부터 많은 박대도 받으셨다.


난 할아버지는 뵙지 못했다. 6.25 때 이웃 프롤레타리아 혁명전사들 손에 의해 설익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누구도 당시의 자세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기에 단편적인 정보들을 내가 종합한 결과이다. 아마 할머니 장례식에 우리 집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 중에도 전사들이나 그 혈육들이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말년에 치매를 앓아, 가끔 형·누나들과 함께 할머니를 찾아 나서야 했다. 우리 집에는 샘이 있어 음용수 일체를 공급받았는데, 누군가 낚시해 온 붕어들을 할머니가 그 우물에 방생해 물을 다 퍼낸 적이 있었다. 우리집 우물에서 물고기가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너무 놀라고 신기했다. 자초지종 나중에 알고 실망한 기억이 난다. 시골집 뒤편에 작은 화재를 일으켜 엄마가 허겁지겁 진압하기도 했다. 정말 물불 안 가리던 우리 할머니셨다.


나와 할머니가 공모한 사건도 있었다. 큰형이 도시락을 놓고 갔다. 그날은 소풍날이었는데 장소가 시골집 근처라 점심때 가져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내가 무려 계란말이가 반찬인 도시락을 발견했다. 우리 집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기에,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도 먹고 싶었던 나는 할머니를 졸랐다. 역시 할머니가 먹으라신다. 에라 모르겠다 공동정범인 할머니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뒤늦게 도시락을 가지러 온 형은 대단히 화가 났으나, 아무것도 몰랐다는 순진무구한 나의 표정연기를 보고 체념한 듯 별 말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시 소풍을 떠났다. 할머니는 이런저런 곤란한 일들을 적지 않게 일으키셨지만 어머니는 크게 화 한번 내지 않으셨다. 그런 시어미니와의 이별에 이불에 얼굴을 묻고 엄니~ 엄니~ 너무도 서럽게 우시던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 건넌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 멀찍이서 문틈 사이로 보았던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 엄마~ 가지 마~"

무슨 의식인지 어떤 과정인지도 모르고 그저 마무리되어 가는 느낌이 들 무렵이었다. 할머니가 계신 상여가 영원히 집을 떠나려 할 때, 그 앞에서 땅바닥에 털썩 앉아 아이처럼 발버둥 치며 통곡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보았다. 정작 살아계신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이 모습은 가장 또렷이 뇌리에 남아있다.

굳이 생각지 않으나, 생각해 보면 아버지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사진으로도 남아 나의 모습도 있다.

누구를 찍었는지 어디를 찍었는지 모를 사진 한 장, 마당 구석 창고 앞에 앉아서 쓸쓸히 어딘가를 바라보던 한 아이... 그 앵글은 왜 그리도 처연했는지, 그 모습은 왜 그리도 애잔했는지...

뒤에 부모님은 이구동성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할머니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막내 손자의 깊은 슬픔이 여과 없이 형상화된 걸작'이라는 평을 하셨다.

우리 막둥이는 이렇게 속이 깊은 아이라고…


그때 난 그냥 더워서 그늘에 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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