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했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신 어머니는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6학년까지 빼놓지 않고 우등상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 여섯 해가 울 엄마 학창 시절의 전부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경찰이셨던 외삼촌까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서둘러 떠나자 가세는 극심하게 기울었다. 엄마의 중학교 진학을 위해 소고기 끊어 가정 방문하셨던 담임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리했던 엄마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열아홉에 시집와 모진 시집살이를 겪으셨고, 결혼 얼마 후 아버지까지 입대하여 홀로 힘든 세월을 견디셨다.
언제나처럼 호미로 혼자 밭을 멜 때면 교복 입고 깔깔대며 학교 다니는 동네 여학생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우셨단다.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시집살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의 엄마는 가장 예쁘고 꿈 많은 대학 새내기 나이셨다.
호미와 잡초가 아닌 펜과 책이 그 손에 들려있었다면 엄마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학교를 떠나 친정과 시집에서 일만 하신지라 글을 쓸 일도 읽을 일도 많지 않았던 엄마의 필체는 초등학생의 그것이다. 가계부까지 손수 쓰시는 아버지이기에 엄마는 점점 세상과는 멀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매일 일기를 쓰시고 빠짐없이 신문도 읽으신다. 우리가 초등학교때 하던 것처럼 큰 소리로…
아마도 10살 된 손자 쭈니(필자의 아들)가 할머니의 낭독소리를 듣는다면 “할머니 속독하세요!” 했을 것 같다. 자신은 책을 속으로 읽는 속독을 아주 잘한다며…
답답하게 느껴졌던 그 낭독이 성인이 된 이후에는 너무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짠 한건 꼬부랑글씨로 인한 침묵... 다름 아닌 USA, NPT, IBRD 등등이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 어머니는 알파벳을 배우지 못하셨다.
어느 날 소리 내어 신문을 읽으시다 또 얼음이 되셨다. 부동자세의 원인은 다름 아닌 짧은 두 줄의 영어 문장이었다. 곁에 있던 내가 보자마자 해석을 해드리자 어머니는 막둥이 가르친 보람이 있다며, 손뼉 셀프 땡과 함께 기쁨의 탄식을 하셨다. 중학교 2학년 정도면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었고 당시 나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날 엄마의 함박웃음은 내 가슴에 함지박만 한 아픔으로 오래 남아있다.
먼 시골에 계시니 이제는 더 듣기도 어려운 그리운 엄마의 소리이다.
이 소리는 전라도 영암 땅에 사시는 삼철이 엄마 삼순여사의 글 읽는 소리입니다. 그리운 소리를 찾아서, 브런치스토리 협찬이었습니다.
그럭저럭 시골에 정착하셨기에 이사에 관한 얘기를 했던 올해 설에, 어머니는 지난번 올라갔을 때 챙겨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내 우등상 꼭 가져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표구나 코팅을 해 놓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속으로 미안했다.
언제 이사를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다음 시골에 내려갈 때에는, 누렇게 빛이 바랜 여섯 장의 내 엄마 우등상을 꼭 가져다 드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