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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May 15. 2024

부러운 친구 ##이


시골 중에서도 시골인 작은 동네에는 아이들도 많지 않았다. 생일이 빠른 동갑으로 나보다 먼저 국민학교에 들어가야 했으나, 친구가 없어 나와 같이 입학했던 ##이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아이 하나가 또래의 전부였다.


##이는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의 부모님은 아들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삼신할머니의 심술이었는지 연이어 딸만 넷을 낳았다. 다섯째를 갖자 ##이 어머니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아기를 지우려 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걸음으로 외부로 나가는 길목의 우리 집에 들러 형님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했다. 형님이라 불렸던 어머니는 어차피 하나 차이이고 그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지 않느냐라며, 소중한 생명을 버리지 말라고 만류하셨다. 형님의 설득으로 그의 어머니가 발길을 돌려 ##이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성별이 다른 여자애보다는 주로 ##이와 놀았다. 국민학교 1학년 때는 반도 같아서 매일 함께 하교했는데, 그 둘은 나머지 공부 하는 날이 많아 나는 항상 기다렸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선생님은 나더러 애들을 가르치라고 하셨고 많은 날들을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을 함께 공부하며 동네로 돌아왔다. 나는 ##이가 간혹 힘센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말려 주기도 하고 대신 때려주기도 했다. 그것은 친구의 어머니가 내게 자주 하시던 부탁이기도 했다. 우리 부모세대가 그랬듯이 ##이의 부모님도 많이 배우지 못하셔서 항상 일이 생기면 자주 내 부모님께 달려오셨고, 유사시에는 그래도 형편이 조금 나은 우리 집에 현금을 빌리기도 했다. 한 번은 같이 놀다가 ##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생전 처음 먹는 꽁보리밥이 낯설었는지 난 밤새도록 설사를 했다. 그런데도 난 그 애가 너무도 부러웠다.


나는 ‘아부지’라 부르는데 그 아이는 ‘아빠’라고 불렀다. 

그것이 왜 그리도 부러웠던지... 그래서 괜히 쥐어박기도 했다. 아이와 함께 산에 가고 물고기 잡으러 다니고, 자동차 연료 필터로 불깡통을 만들어 주셨던 ##이네 아빠가 너무도 좋아 보였다. 깡통에 구멍을 뚫어 입구의 양쪽 위에 철사와 줄을 연결한 후 불붙은 숯이나 나무를 넣고 열심히 돌리는 놀이는, 옛날 시골의 큰 명절이었던 정월대보름에 하지 못하면 일 년이 아쉬운 즐거운 놀이였다. 깔끔하고 질서 정연하게 뚫려있던 친구의 불깡통, 작은형과 함께 아버지가 안 계실 때 틈틈이 낫과 송곳으로 되는대로 상처 내어 처참하게 난자되고 찌그러져 볼품없던 나의 그것을 비교하며 또 마냥 부러워해야만 했다.



나의 옛 친구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전역 하루 전날의 사고로 고인이 되었다. 당시에는 나도 군복무 중이었다. 하루도 채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 총을 쏜 사람도 총알을 맞은 사람도 그 짧은 서로의 마지막을 견디지 못했다. 헌병이었던 내가 동료들에게 전파했던 전방의 총기사건이 바로 죽마고우가 숨을 거둔 그 건이었다는 사실을 휴가 때 어머니를 통해 알았다. 비보를 전하면서 병원행을 말린 당신의 죄라며 눈물바람을 하셨다. 이후에도 ##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유사한 상황은 재연되었다. ##이 어머니도 충격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셨고 지금은 아빠만 홀로 고향집에 사신다.  


재 작년 추석에 뵙고 삼철이와 아들이라고 여러 번 큰소리로 말씀드리자, 그 길로 자신의 집으로 향하시더니 눕지 않고는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굽은 허리로 감을 따다 주셨다. ##이 생각이 나서 가져왔다며 눈물을 훔치며 바삐 돌아가시던 그 모습이 오래 가슴에 남는다.


내 맘속에 단 하나뿐인 옛 친구 ##이의 아빠는 부디 친구 몫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빈다.

내 엄마의 자책도, 그 가족과 첫 친구인 나에게 짧아서 더 소중한 ##이 와의 지난 추억을 선물한 것으로 멈추길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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