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동급부 Dec 11. 2024

이런 여자친구가 되어 줄게

To. 삼철.

벌써 가을인가 싶어. 어째서 그리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지. 스물세 살이 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스물넷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가 온 거니. 난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매 년마다 계획 없이 나이만 늘어가네… 에고 에고. 스물셋이 여자나이 한참이라는데 나는 해논게 뭐가 있나 싶어. 아무것도 없어. 실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전에 무언가를 만들려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구나. 그래두 너는 제대해서 스물다섯이면 군대 갔다 온 거 인정이라두 해주지. 여자 나이 스물다섯이면 할머니 취급 할걸. 아마. 꺾어진 오십이라나. 지들은 안 늙나? (헛소리)

아침저녁으로 춥다. 건강에 유념하는지 몰라. 힘들 때일수록 아프면 안 돼. 곁에 아무도 없을 때 아픈 것처럼 정말 서러운 건 없을 거야. 그러니까 꼬박꼬박 깨끗이 씻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항상 긴장감 있게 생활을 해야지. 혹, 아픈 건 아니지? 군에서 Pizza 같은 거 나올 리 없으니까(스파게티) 밥 못 먹는 일은 없을 테고… 그냥 걱정이 돼서. 너 왜 BX라고 아니 BX에 와서 음성 넣는 거라고 했던 날 9/20 기억나? 그때 잘하면 통화할 수도 있었는데… 삐삐 멘트를 바꾼다는 게 잊어버렸지 뭐야. 지금은 바꿨거든. 그때 통화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하지만 정말 며칠 있으면 너 특박 나오는구나. 긴가민가 해. 정말 나오는 거 맞는 걸까?

너 첫 특박 나와서 귀대할 때 가기 싫어하던 네 모습이 눈에 선한데 벌써 또 6주가 흘렀구나. 거봐. 내가 뭐랬어. 6주 금방이라고 했잖아. 봐, 벌써 6주 째다. 이렇게 6주가 빨리 온다면 네 제대도 얼마 남지 않았네… 휴우.

오랜만에 편지를 쓸려니 힘들다. 정리도 잘 안되고 뒤죽박죽이야.
특박 나오면 뭐 할 거야? 요번에는 친구들도 좀 많이 만나고 푹 좀 쉬고 후회 없게 보내. 2박 3일이라는 기간이 너무도 소중한 거 같아. 지나고 나면 금방 후회하게 되잖아. 저번엔 그랬을 거 같아. 그러니까 요번엔 후회 없이 잘 보내도록 해. 지금부터 계획을 짜면 되겠구나. 그럼 특박 계획 열심히 짜고, 은경이는 낼 또 출근해야 하므로 이만 잘련다.
삼철이도 좋은 꿈 꾸고 우리 꿈속에서 만나자. 그럼 잘 자.


1998. 9. 29.



이런 여자친구가 되어 줄게…

네가 피곤한 빛을 띠고 아무 말하지 않을 때
무슨 일 있었냐고 다그치기보다는
따뜻한 눈빛으로 몇 시간이고 너를 바라보다가
헤어질 때 믿는다는 한마디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그런 여자 친구가 될게.

네가 힘들어할 때도
어설픈 위로로 더 답답한 내 마음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냥 네 옆에서 조용히 다독거리고
네 맘 편해질 때까지 네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여자친구가 될게.

여자친구라는 호칭에 얽매이지 않고
때론 동성 같은 편안함으로 털털함으로
깔끔하지 못한 식당이나
유쾌하지 않은 네 친구들의 대화에도
어울릴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될게

사소한 일에 자존심 세우지 않고
언제나 솔직한 말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네 기분을 상하게 할 얘기는
돌려서 장황하게 수식하거나
내가 네게 뭘 가르쳐 주려고 하기보다는
짧고 간단하지만 네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네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하고
내가 너에게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 역시 마음속에 담아두고
한꺼번에 터뜨리는 대신에
그때그때 조용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나의 마음을 밝히는 사려 깊고 똑똑한
그런 여자친구가 되어 줄게

여차친구가 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너에게 맞추고
자나치게 헌신적이려고 하진 않을 거야
어차피 나에게도 나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너의 여자친구가 되는 이상,
너의 관심사와 너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너의 취미 생활을 함께 하려고 애쓰며
아무리 나와 맞지 않아도 너의 즐거움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그런 여자친구가 될게.

너와 다투고 기분이 아무리 나빠도 길거리에서 네 친구를 만나면
밝게 웃으면서 다정하게 네 팔짱을 낄 줄 알고
너에게 많이 실망한 오후에 내 친구를 만나도
네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는 그런 여자친구가 될게.


어느 날 갑자기 네가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
네가 힘들어하면서 나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떠날 줄 아는 멋진 여자, 하지만 반대로 내가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음을 핑계대기보다는 솔직하게 나의 마음을 말하고
너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줄줄 아는 그런 여자가 될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며
네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시원스럽고
사랑스러운 그런 사람이 될 거야. 네가 돈이 없을 때에도
시간에 쫓길 때에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그런 여자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지?

… 그런 여자친구가 되어 줄게…

네가 내 남자친구가 되어 준다면...



직접 짓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이 묻어 있을 글이 참 좋다.

그녀는 여자친구는 물론 연인 그리고 아내가 되어 주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오면서 내가 그녀에게 어떤 남자친구, 어떤 연인 또는 어떤 남편이 되어 주겠노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이미 우리는 부부이니 나는 그녀에게 어떤 남편이 되어 주고 있을까?

우선 외모와 경제적 능력면에서 내 점수는 매우 낮다. 자상하거나 요리 또는 가사를 잘하거나, 공유를 통해 행복한 시간들을 만들 수 있는 취미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래오래 생각해 보아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러다 겨우 하나 생각해 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하나, 만약 아내가 내게 어떤 남편이 되어줄 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네 편이 되어 줄게, 너와 내가 언제나 우리 아이의 편이 되어 주는 것처럼..."


진짜 이것 딱 하나다.

우리 은경이 짠하다. ㅠ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