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동급부 Dec 08. 2024

오지 않은 오늘

삼철에게.

졸린 눈을 비벼가며, 억지스레 눈을 떠가며 너한테 편지를 쓴다.
새삼 무슨 생색까지 내며 왜 내가 편질 쓰냐구? 글쎄, 오늘은 생색이 내고 싶었나 봐. 네가 많이 고마워하라고. 하하

아주 간만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좀 늦게까지 놀았더니, 그게 화근이었나 봐. 반팔 T만 입고 거리를 쏘다녔었거든. 저녁에 감기기운이 약간 있었는데 신경 안 썼었거든. 근데 어쩌니… 목소리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어. 아예 나오질 않아. 억지로 소리 내면 나오기는 하는데 완전히 최불암 아저씨 목소리야. 헐~ 어서 나아야 하는데 그래야지 너 특박 나오면 이쁜 내 목소리 들려줘야 할 거 아냐. 근데 빨리 나을 거 같지 않아. 한 달 이상 간 적도 있었거든… 환절기라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힘들지 않니? 이등병 때가 제일 힘들다던데… 내가 네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줬으면 하는데 어쩌니. 난 힘두 없구… 대신 편지 자주 하면 되는 거지? 거 보다 더 좋은 거 없겠지 머. 참 궁금해. 넌 어떻게 지낼까. 하루하루가 정말 바쁘겠지? 고단하고 힘들어두 쫌만 참아. 일병만 돼도 수월할 거 아냐. 많이 힘들고 지칠 거 같은데 내가 어떤 식으로 위로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어떤 말로 힘을 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구…

요번에 특박 나오는 거 맞지? 아닌 거 같기두 하구…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말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디서 오는 거야? 충주? 그럼 서울 오면 몇 시일까? 연락해. 볼 수 있으면 봐야지.

어제 오랜만에 나이트를 갔어. 근데… 나이가 먹으니까 놀기두 쉽지 않더라구… 나이 먹는 것도 슬픈데 몸까지 따라주질 않는다니.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의 맘을 이해하겠더라. 하지만 재미있게 놀았어. 생일파티두 하구 이래저래. 원래 요즘 나이트는 10대들이 주름잡는다고 하는데 어젠 더하더라. 토요일이라서 고딩들 화장하구 정장 차려입구, 남자애들도 와이셔츠 입구 양복바지 입구… 우리나라가 어쩌려고 이러는지… 한심하더라. 학창 시절 잘 보내도(내 기준) 후회되던데 걔네들도 분명 후회할 텐데… 쫌 심했나?

다음에 또 편지할게.


1998. 9. 27.


P. S.  너희 아버지께서 불러주신 주소 갖구 보내는 건데 자대
받은 데가 충주 맞어? 혹시 이 편지 너한테 안가믄 어쩌지?
너희 형한테서 호출이 없길래 갖은 방법 동원해서 알아본 건데.
에라 나도 몰라. 집에 편지 쓸 시간두 없는 거야?
편지지가 다 어디루 갔는지 모르겠어. 아무 데나 쓸 수도 없구.
암튼 내가 한 얘기 알아 들었지?
뒤죽박죽 미안…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 한 시골 국민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담임선생님께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대통령이 뭐예요?"



TV에서 본 어떤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툭 던진 아이의 당돌한 질문에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야.
주인들을 위해 일하는 종을 공무원이라고 하는데,
많은 종들에게 주인이 일일이 일 시키기 어려워서
국민이 뽑은 종의 대장이 바로 대통령이야."



당시의 선생님의 답변이 너무도 의아해서 아이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말씀이 대통령중심제를 취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의 나아갈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0년이 지나 지천명을 바라보는 그 아이가, 몹시 추웠던 어제의 여의도에서 수 십만 명과 함께 간절히 바랐던 오늘은 결국 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이상이 현실과 가까워진 오늘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써 놓았던 제 글 또한 이런 오늘과 어울리지 않기에 모두 지웠습니다. 

그간의 형식과 다르게 아내의 글 외에 제가 더 연결하지 않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