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1, 2
1. 삼철에게…
잘 있었어? 오늘 추석이야. 아침에 나랑 통화했지?
얼떨떨한 네 목소리에 괜히 전화했나 싶더라. 혹시 혼난 건 아닌지… 별 반가운 기색도 없어 보이고… 섭섭. 아무튼 어떻게 해서라도 너 있는 곳 알았으니 됐다 싶어. 근데 중요한 건 못 물어보고 끊었어. 또 전화해도 되느냐고. 괜찮겠느냐고. 묻고 싶은 말이 엄청 많았는데 막상 수화기 저편에 네 목소리 들으니까 하나두 생각 안 나더라구. 뭐부터 물어봐야 하나 싶은 게 말야. 어디 아픈데 없냐구 물어보지도 못하구. 기다리던 전화라도 있었던 거야? 그래서 실망해서 목소리가 그렇게 시무룩한 거였어? 통화할 땐 몰랐는데 끊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오늘 뭐 먹었어? 명절인데 맛있는 거 많이 먹었어?
제대로 특박 나왔더라면 맛있는 거 많이 먹구 갔을 텐데… 난 그냥 하루종일 집에 있었어. 우리 큰집은 기독교라 제사를 안 지내거든 그래서 굳이 갈 필요가 없지. 엄마하구 아빠만 가시구 난 그냥 집에서 놀았지 머. 그래두 먹을 건 다 먹어. 우리 이모네 집이 우리 집서 100m 채 안되는데 그 집은 제사 지내거든. 그래서 꼽사리라고… 대신 명절 전날 뼈 빠지게 음식해 주지. 보조경력이 벌써 10년이 넘었다. 어려서는 명절에 좋았는데 이젠 다 컸나 봐. 움직이기도 귀찮구.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깐. 근데 세월 진짜 빠르다. 벌써 추석이고 또 쫌 있으면 설날 이잖아. 에고 그리고 보니까 또 쫌 있으면 너 제대하네? 하하, 내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서 맘 상한 거 아니지? 참 그러고 보니까 내가 너 특박 날짜에 맞추서 복권 보낸 건데… 하나는 10월 2일이 마지막 날이고 또 하나는 며칠이더라? 암튼, 그거 긁어 봤어? 당첨 됐으리라곤 기대 안 하지만 그래두 500원 짜리라두 됐으면 아깝잖아. 어떻게 된 거니? 내 딴엔 신경 써서 너 나오는 날짜에 맞춰서 산 건데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네. 아까운 복권.
너한테 그전에 9월 10일경쯤 써논 편지가 3통 있는데 못 보냈다. 날짜가 너무 지나서 너 나올 때까지 갖구 있다가 그때 주던가 아님 그냥 찢어 버리던가 해야겠어. 또 너 나오면 사달랠려구 우표도 안 사고 있었는데. 마지막 하나 남은 거까지 다 써버리고. 우표도 사러 가야겠다. 편지지도 사러 가야겠고. 가만 보니깐 네가 제 날짜에 나오지 않아서 일이 엉켜버린 게 많다. 또 언제 나올 줄 모른다니 마냥 기다릴 수도 없구.
내가 가르쳐준 휴대폰 번호랑 직장 전화번호 알고 있지?
혹시 둘 다 연락이 안 되면 삐삐 쳐. 계속 살려둘 거니깐.
그럼 명절 잘 보내고. 또 편지할게.
1998. 10. 5.
추석에
P. S. 네 목소리가 시무룩해서 그런지 나도 맘이 안 좋아.
괜히 전화했나 싶어. 미안해.
2. 삼철이에게
안녕. 오늘도 여전히 연휴야. 추석 마지막 연휴.
어제는 거리에 사람이 하나두 없었을 거야. 헌데 오늘은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왔는지 시끌벅적. 술집두 노래방두 길거리의 포장마차에두 사람들로 가득해. 집에서 쉬거나 하지. 그러는 나는 어떻게 사람이 많은 걸 아냐구? 당연 나두 나갔다 왔지. 돈 벌러. 오늘 국회에서 아르바이트했거든. 그래서 바깥구경을 한 거야. 물론 아르바이트 끝나고 저녁에 친구들 만나긴 한 거지만.
… 국회에서 음악 듣고 TV보며 설렁설렁 일해서 일당 30,000원을 받아 공돈이 생긴 듯 기분 좋았다는 얘기 …
오늘은 뭐 했어? 근무 내일 서는 거니? 여섯 시간씩? 대충 들었어.
너 내무반 전화번호 알아내려고 내가 얼마나 많이 노력한 줄 알아? 아니, 첨엔 몰랐지. 내무반에 전화가 있다는 자체도, 또 걸을 수도 있다는 걸. 생색내려고 얘기한 거 아냐. 그냥 갑자기 그때일이 생각이 나서… 헌병과 방공포대가 젤 힘들다던데 충주엔 둘 다 있지 않니? 최악만 모였나 봐. 솔직히 지금 네가 얼마나 힘이 들지 잘 감이 오질 않아. 그저 막연한 내 생각일 뿐이지. 하지만 하루에 꼼짝 말고 여섯 시간씩 서 있을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와. 나두 같이 고통분담하면 좋을 텐데…
삼철아, 면회 언제부터 가능한 거야? 아니 되면 얼굴이나 보러 갈려구. 충주면 뭐 그리 멀지두 않잖아. 하루 시간 내서 다녀오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깐. 너 내가 전화해서 힘드냐구 물어봤을 때 괜찮다고 했었지. 하지만 나 알고 있어 힘들 거라는 거. 하지만 넌 아니라구 했지. 참 멀게 느껴졌어. 네가. 난 너의 힘들다는 말도 받아줄 수 있는데 그 정도도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닐까 싶어서 말야. 다 알고 있는데…
낼은 출근해야 돼서 일찍 잘래. 휴일엔 잠두 많이 자고 푹 쉬는데도 다음 날 출근 할려면 항상 힘이 들어서 말야. 그럼 너두 잘자.
1998. 10. 6.
초유의 사건이었다.
쫄따구 이병의 여자친구가 소대 상황실에 전화를 건 것 말이다. 외부 수신 전화가 있긴 하나 그렇다고 거는 것은 물론이고 받는 것조차도 사병들이 이용할 수는 없었다. 간혹 외부에서 쫄병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가족에게 생긴 변고를 알리는 정도의 긴급한 통보 정도였다.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나는 아직도 당시 상황을 기억한다.
갑자기 소대가 소란스럽더니 대단히 못마땅한 표정의 고참의 호출로 상황실로 갔다. 근무자가 아닌 다수의 상병·병장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황당, 미움, 호기심이 각자의 성향에 따라 적절히 섞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인지도 말해 주지 않아 전화의 주인공을 몰랐다. 나는 너무도 놀라고 당황스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기 쉽지 않았고 긴 이야기를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후일에 대한 걱정이 더 컸었다. 내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소식이 다른 이들에게 먼저 전해졌다는 사실도 뒤늦게 눈치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나를 보는 그들의 표정은 딱 이랬다.
“하다 하다 별 짓을 다 한다!!!”
당시 나는 이른바 갈굼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후에 선임들에게 깨질 때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하기도 했다.
“쫄따구 새끼가 빠져가지고…”
이 일은 소대의 불문율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고, 내가 고참이 되어서는 그 불문법을 폐기했다.
얼마나 궁금하고 걱정이 컸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전화를 했을까... 우여곡절 끝에 연결된 전화 저편의 시무룩한 내 목소리에 얼마나 실망이 컸을지 알고도 남는다. 하지만 곱지 않은 시선의 그들 앞에서 힘들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을 알리 없는 은경은 반가운 기색 없는 나의 답변이 몹시도 서운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멀게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일은 또한 내 맘 속에 그녀가 너무도 깊고 강하게 들어와 버린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