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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동급부 Dec 22. 2024

눈사람




잘 있었니? 음... 나두 잘 있었어.
재미있니? 군생활이. 당연히 재미있을 리 없겠지만. 그냥 물어봤어. 싱겁지?
나두 모르겠어. 싱겁게 변해가는 나를... 난 왜 사는 게 이렇게 재미없을까? 다른 사람들은 아닌 것 같던데... 나만 그런가 봐. 뭐 좀 재미나는 일 ㅇ벗을까?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 이런 거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들어 참 지겹게 느껴져서 말야 그냥 기분도 그렇고 딱히 풀만한 것도 상대도 없고. 혼자 여행을 다녀올까 생각중야. 아무 데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기보다는 그저 바람을 쐬러 가는 거겠지만... 그냥 한강이나 가야겠다. 젤 가깝구 혼자 가기도 편하잖아.(매일 보긴 하지만. 사무실이 여의도잖아.)

벌써 겨울이 오나 봐. 낮에두 꽤 쌀쌀하더라고.
오늘 명동엘 갔는데 사람 진짜 많았어. 주말이라 그런가 봐.
예전엔 주말엔 명동에서 항상 '안상수'를 보곤 했는데... 요즘은 다른 데서 노래 부르나 봐. 찾기 힘들더라고...
그래... 더 쓸 말이 없네. 잘 지내구.
그럼... 안녕.

1998. 10. ?

P.S. 생각 없이 전화해서 미안해.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거야.
나 때문에 혼난건지 모르겠어. 그냥...... 마음이 무겁다.
몸, 건강해. 잘 지내구.

from. 은경


가을이라 하늘이 푸르고
날씨가 너무 좋아 그리움을
풀어놓았더니 더욱
고독해졌습니다.

이런 날에는 푸른 하늘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도 좋지만

그대의 눈빛을 바라보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 용혜원 '가을에'


그가 보고 싶어도, 흐릿하게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그는 내 손에 닿지 않는다. 무심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그를 조금씩 지워간다는 것.

- 서연희 '짝사랑'


사랑하는 사람아, 나만을 생각해 달라고 애원하지 않을게, 사랑하는 사람아,
내 사랑을 알고 있냐고 애써 묻지 않을게,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떼쓰지도 않을게,

사랑하는 사람아 이것만 선택해 줘.
죽을래. 나랑 결혼할래.

- 양재선 '사랑하는 사람아'



사뭇 다른 느낌이다.


먼저 형식적인 면을 보자.

애쁜 은경, 깜찍 은경, 깜찍이 소다 등 그 화려한 보내는 이가 없다. 편지봉투에도 쓰여있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본문의 길이가 매우 짧고 자신의 글이 아닌 시들이 지면을 채우고 있다. 연, 월은 기재했으나 날짜 '?'인 것 또한 독특하다.


다음으로 실질적인 면을 보자.

무미건조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말처럼 싱거운 인사와 함께 자신의 감정에 대한 단조로운 표현을 통해 여행을 계획하더니 결국 한강을 가겠다고 한다. 이후 이어진 글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작과 비슷한 구조로 의미 있는 내용을 찾기 어렵다.

형식과 실질의 구분이 얼른 되지는 않으나 문체 또한 간결하고 차갑다.


그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추신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문제의 전화...


연재를 위해 편지들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오늘의 편지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상황실로 전화를 건 이후에 나와 별도로 연락이 되어, 내가 그녀에게 불문율을 어긴 초유의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런 내용은 전무하다. 

그러던 차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자고 일어났는데 아내가 울라프가 되어있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냉기가 느껴졌다.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냉랭한 표정과 사무적인 말투를 유지했다. 오후에 잠시 전화를 걸었을 때에도 한결같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더니 자초지종은 이랬다.


위염이 있는 아내에게 또 통증이 찾아왔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뒤척임으로 옆에서 자고 있는 내가 깰까 봐 그녀는 조용히 거실 소파에 누웠다. 그것은 새벽이 되어 내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내가 곧 바로 침실로 다시 가서 드르렁드르렁 - 아내의 표현에 의하면 - 잠을 잔 것이다. 즉, 거실에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아내를 본체만체한 내란죄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보지 못했다. 안경이 없으면 수 미터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내게 불까지 꺼져 있는 거실에 누워있는 그녀가 보일리 없다. 옆에 없다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강한 반론이 제기되긴 했으나 난 정말 몰랐다.


이 작은 사건 이후에야 편지 속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차가운 본문과 추신이지만, 다른 이의 글을 빌어 속마음을 전하려 한 듯하다.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마침내 듣게 된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전혀 없어 실망과 서운함이 컸을 것이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서 내가 곤란활 수도 있었다는 현실인식을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상처가 훨씬 아팠다. 스스로 눈사람이 되어 내 서운함을 알아 달라는 아침의 모습이다.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어렵게 한 전화 저편에서 돌아온 나의 답변으로 인한 상실감이 두 편의 시에 묻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은 너무도 강렬하다. 드라마 속 멋진 남자배우의 유명한 명대사가 시였구나!!! 결혼을 할지 이별을 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최후통첩을 하던 10여 년 전 아내의 모습도 떠 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것만 선택해 줘

죽을래? 나랑 결혼할래?



결혼했다.

죽지도 않았고 이별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새 생명이 찾아와 만나기까지 했다.


또한, 이 선택은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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