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큰 보폭으로 다섯 걸음을 걸으면 세계의 끝

by 비차

낮이면 펼쳐지는 감정들을 잘 접어 넣어 두었다가 새벽마다 펼쳐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감정에 새겨진 구겨진 시간의 자국들을 쓸어보면 손 끝이 버석거립니다 젖었다 마른 종이 같습니다 나는 젖었다 마른 종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맞을까 매일 고민하는데 고민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내일의 날이 밝고 그러면 나는 또 자연이 뭘까 자연스럽다는 것은 뭘까 그건 녹색일까 따뜻할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걷고 먹고 웃고 떠들고는 합니다 어떤 교단 앞에 서는 일은 선생이 아니라 광대같기도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그리는 선생님은 제가 아는 선생님과는 다른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선생님은 그보다 훨씬 밝고 웃긴 분인데요 그런 말을 듣고서는 내게 관심이 많나 보구나 하며 웃었습니다 실은 웃고 싶지 않았는데도요


내 세계는 아주 작습니다 그건 5평 혹은 8평 정도 됩니다 눈을 감고 다섯 걸음을 큰 보폭으로 걸으면 세계의 끝을 마주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이렇게 금방 끝날 수 있다는 건 아주 시시한 일입니다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남몰래 고백하자면 실은 행복해지고 싶다든가 사랑하고 싶다든가 하는 말들을 자주 하지만 더 이상은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든가 내가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건 믿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냥 발생하는 것 같아요 감정은 종종 현상 같아서 어찌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냥 놓아두어야지요 어떻게든 통제하려는 노력도 너무 부질없지 않습니까


나는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비를 맞고 싶지는 않은 사람입니다 비를 맞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편안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좋아하면서 편안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가지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책임질 수 없는 것은 가지지 않기로 아주 오래 전에 맹세했거든요


이제 우리는 가만히 눈만 마주하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자 주고 받은 말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 말들이 모두 텅 비어 공허하니까 말을 많이 할 수록 더 비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제 그만 좀 말 할 때가 되었지 않니 그 말조차 너무 길지만


한 마디의 말이 줄줄이 내려쓴 편지보다 더 깊게 박힐 때가 있는 건, 네 손가락이 얼음처럼 차갑고 입김이 축축한 건, 침대가 따스하고 쓸쓸한건, 웃으면서 네가 우는 건, 오래 된 기억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건, 나를 걱정하면서도 네 눈빛이 날 얼어붙게 하는 건, 그런 건,


눈을 감고 큰 보폭으로 다섯 걸음을 걸으면 세계의 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리는 이마를 맞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