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과 열정을 모두 갈아넣었는데...

가족의 지원까지 갈아넣어 준비했던 두번째 PEET시험에서 모두 불합격했다

by 차차약사

모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나는 왜 그런지 스스로도 의아하지만, 항상 낙관적인 편이다. 수능보고 나서도 '만점받고 인터뷰하자고 하면 뭐라고 하지?' 라고 생각하고는 했었다. 진짜 만점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그런 공상하기를 즐겨하며 기분 좋아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 붙을 것 같았다. 둘 다 붙으면 당연히 B대학에 가야지~라고 결정까지 내린 참이었다.


B대학의 결과가 먼저 나왔다. 결과는...


예비번호조차 받지 못했다. 같이 공부했던 스터디원들도 결과를 알려줬다. 누군가는 합격했고 누군가는 나처럼 예비번호도 받지 못했다. 비슷비슷했던 피트 점수를 갖고 있었는데 스펙이 무난하다 생각했던 학생은 합격했고, 저 사람은 훌륭하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불합격했다. 아쉽지만 정성대니까... 결과를 받아들이고 나는 저 학교에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었구나...라는 걸 씁쓸한 마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이제는 무조건 A대학에 다녀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A대학의 결과가 나왔다. 결과는 불합격...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예비번호 9번을 받았다. 당연히 합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불합격이었다. B대학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과 마음이 달랐다. 초시 때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과도 달랐다. 아니, 초시 때는 결과를 보지도 않았다. 시험을 보자마자 망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몇 개월 동안 내 시간을 온통 PEET를 위해서만 갈아 넣었다. 나이가 많아서도 스펙이 달려서도 아니고 오로지 PEET 점수와 토익 점수, GPA 점수가 중요한 학교인데 거기서조차 떨어지고 나니깐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눈물이 나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남편도 우리 가족들도 모두 내가 합격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내가 합격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결과를 맞게 되니 나만큼이나 우리 가족들도 당황했을 것이다. 남편은 괜찮다고 얘기해줬다. 하지만 내가 괜찮지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있을까. 아니 없다. 결단코 없다. 그런데 최선을 다해 본 내 삶의 결과가 이렇게 무참히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가 전화하셨다. 위로를 해주셨다. 괜찮다고... 아이를 키우면서 사는 것도 의미있는 인생이라고...






다 울고나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다시 해석했다. 내 점수라면 작년에는 들어갈 수 있었던 점수였고 그래서 나는 당연히 합격을 예상했다가 결과가 그렇지 않아서 당혹스러움이 더욱 컸던 것 같다. A대학에 이미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서를 넣을 때 내 점수면 합격할 거라고 얘기해줬던 친구다.


"불합격했어... 예비번호 9번을 받았어."

”정말이야? 작년에는 초합에 붙었던 점수인데... 이번에 점수가 올라갔나보네. 그런데 그 점수면 추합할 거야. 걱정하지마“


친구의 말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A대학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작년 합격자들, 추가합격자들의 수를 보니깐 내 예비번호 정도면 추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어쨌든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추가합격은 등록을 포기한 학생들이 나와야지만 결정되기 때문이다. 8월에 시험을 보고... 2월까지... 그 기다림이 너무나 길었다.


드디어 추가합격!!!!


뛸 듯이 기뻤다. 입학한지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의 피말렸던 순간들이 희석되어 기억되고 큰 일이 아닌 듯 느껴지지만... 처음에 두 학교 모두 불합격했을 때의 좌절감, 그리고 추가합격이 되고서의 기쁨은 그 당시에는 너무 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 딱 떨어지는 PEET 점수를 받은 것 같다. 너무 잘 봐서 걱정을 안 할 정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합격만을 바라는 점수였다면 남편과 주말부부하는 것을 감수하면서 지방대학에 원서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딱 떨어지는 점수를 받아서 남편과 주말부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서울에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 합격해서 아까운 점수가 아니라 지루하고 피말리는 입시여정 끝에 추가합격을 해서 약대에 합격한 것에 너무나 감사할 수 있는 점수를 받은 것이다. 나의 점수가 정말 딱 좋았다.






30살에 아프리카에서 한국에 들어왔다. PEET 제도라는 것을 2월에 알고 3월에 상견례를 한 후에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잘못된 공부방법으로 그해 8월에 본 첫 PEET 시험에서 죽을 쑤고 나왔다. 그리고 10월에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다. 아이 키우며 살 팔자구나~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산을 했다. 방황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소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아보자... 싶었다. 그리고 한 종교단체의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컴퓨터 행정작업을 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작업에서, 사실 나는 봉사하는 기쁨보다는 나의 작은 존재감에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곳의 어른이 내게 '젊은 사람이 하고 싶은 걸 먼저 해라. 이런 봉사활동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다'라는 말씀에 다시 한번 약대 준비를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인간은 미련이나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이나 약대 준비는 미련이 남았다. 최선을 다해보지 않았다는 미련 말이다.


그렇게 다시 2월부터 PEET 공부를 시작했고, 이번에는 학원을 다니면서 돈을 아끼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했다. 신혼이었지만 남편과의 시간도 포기하고 주말에 남편은 혼자서 인스턴트 음식을 해먹으며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나를 지원해줬다. 나의 모든 역량을 갈아넣고 가족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8월 시험까지 치를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시험에서 처음에는 모두 불합격을 하고 말았다. 그때의 패배감이란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운이 좋게도 딱 추가합격할 수 있는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드디어 바라던 약학대학생이 되었다. 2년의 수험생활 여정이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내가 수험생이 될 것이라고는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언제나 꿈이 컸고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수험생 생활을 하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인생이란 아이러니해서 아프리카까지 다녀오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삶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능력의 중요성을 그때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30살에 수험생 생활을 시작했다.


요새는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고 은퇴가 빨라지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다. 약대준비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내 나이는 참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이는 아직도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는 젊은 나이였다. 결과가 좋아서 그 과정 또한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이겠지만, 그때 내 나이가 많다고, 취업이 안 된다고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최선을 다해봤던 그 시간이 매우 소중하다.


그때 도전했기에 내 삶의 방향이 많이 틀어졌고 나는 약학대학을 다니면서 두 아이의 엄마도 되었다. 지금은 입학한지 4년... 동기들은 이미 졸업하여 약사로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2년을 휴학했다. 동기들보다 졸업이 늦어져서 입학한지 6년이 지난 내후년에 드디어 약사가 된다. 그때는 내 나이 39살이다. 약대를 준비한다고 할 때 나이와 기회비용을 고려하며 시험을 볼까말까 고민하던 많은 글을 보았다. 나는 다행히도 많은 것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력을 쭉 쌓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고민없이 결정할 수 있었던 그 선택에 감사하고 지금 이렇게 약대생으로서 학교를 다니고 글도 쓸 수 있는 상황이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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