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다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산부입니다.
약학대학에 합격하고 처음 갔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 나의 관심사는 2가지였다. 첫 번째는 30대가 몇 명 있는지였고, 두 번째는 휴학생이 얼마나 있는지였다. 자기소개 시간에 속속들이 발견되는 30대 친구들 보면서 흐뭇했던 순간이 생각난다. 나는 임산부였기 때문에 휴학 여부가 또 다른 관심사였다. 교수님이 학교 현황을 발표하실 때 귀를 쫑긋했다. 약학대학 4학년 통틀어 휴학생이 0명이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아 어떡하지. 나는 휴학해야 하는데... 약대는 휴학하면 안 되는 건가 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리엔테이션 날 출산예정일이 나와 1주 차이나는 임산부 친구를 만난 것이다. 이 친구와 운명을 함께 할 수 있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피트 시험 제도가 생기면서 나처럼 나이 많은 학생들이 약학대학에 많아졌다. 수능을 보고 약대에 가야 하는 거였다면 나도 다시 대학생이 되겠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피트 시험이 수능보다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과목을 공부해야 하는 수능에 비해 4과목을 공부하는 피트 시험의 진입문턱이 낮게 느껴졌다. 2022년부터는 다시 수능을 보고 약대에 지원해야 한다고 한다. “피트 시험 제도라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나이 많은 언니들이 많았어~”라는 얘기가 약대에 전설처럼 남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입학한 해에 피트 시험 1회 졸업생들이 처음 배출되었다. 피트 시험 제도가 알려지면서 점점 30대 합격생들이 많아졌다. 나처럼 재취업, 결혼, 육아를 계기로 약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점점 더 피트 시험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30대가 별로 없을까 봐 우려한 것과 달리 내가 입학한 2015년도에는 44명 중에서 10명 가까이가 30대였다. 해가 갈수록 30대가 많아지면서 약대 내에도 새로운 문화가 생기게 되었다.
피트 시험 전에는 휴학생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지금 내가 다니는 학교는 여대라서 더욱 그렇다. 약대는 졸업 직전에 약사고시에 합격해야 약사가 된다. 약사고시는 합격률은 높은 편이나 쉬운 공부는 아니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는 양을 공부해야 한다. 이번 해에 약사고시를 치른 친구의 말로는, 4년 동안 배운 1과목을 하루 만에 공부해야 할 정도로 공부량이 많다고 한다. 함께 공부해야 어떻게든 진도가 나가고 공부를 하게 되고 무사히 약사고시까지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공부하는 동기들이 중요해서 휴학을 거의 하지 않는다. 4년 동안 정을 쌓은 친구들과 공부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혼자 휴학했다가 복학했을 시 혼자서 약사고시를 준비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여대의 특성도 있다. 군대 가는 사람이 없어서 더욱이 휴학생이 없고 동기들과의 관계가 유독 중요하다. 남녀공학은 군대 다녀오는 복학생들이 필시 있고 자연스럽게 선후배 관계가 생기지만 여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홀로 휴학하는 것이 더욱 부담스럽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휴학을 하지 않는 것이지 다행히도 휴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신입생 첫 해에 휴학은 원칙적으로 안 되지만 출산이나 질병과 같은 특수한 이유라면 특별 휴학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이전에는 없던 휴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수님들에게 괜한 눈치가 보이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교수님들도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신입생 첫 학기에 약학 실습이 있었다. 실습 초반 몇 주에 유독물질을 다루었다. 임신한 친구가 교수님에게 찾아가서 임신한 것을 말씀드려보자고 제안했다. 교수님도 임산부가 있다는 것을 아시면 실험 진행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찾아뵈었다. 교수님은 실습 일정을 살펴보시더니 유독물질을 다루는 실습 때는 출석 체크하고 이론 수업만 듣고 실습할 때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 후에는 기계로 수업하므로 그때부터 수업에 참여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런 배려까지 바라지는 못했는데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놀랍기도 했고 감사했다. 그래서 초반 몇 주는 출석 체크하고 이론수업만 듣고 본격적인 실습 시작 전에는 실험실에서 나왔다. 교수님의 배려도 감사했지만 동기들이 이해해주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임산부는 사회적으로 배려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은 맞다. 하지만 대학에는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임산부를 위한 규칙이나 문화가 존재하기는 힘들다. 먼저 말씀드리면 학교와 교수님들, 동기들은 흔쾌히 배려를 해준다. 배려받을 수 있는 상황에 너무 감사했고 이해해 주신 교수님과 동기들에게 정말 감사했다.
또 다른 실습 시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이미 이때는 첫째를 낳고 복학해서 아이가 있을 때였다. 쥐를 대상으로 약제를 넣는 실습을 진행하는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쥐를 다루는 데 능숙하셨지만 이런 실습이 처음인 학생들은 낯설고 힘든 수업이었다. 그때도 교수님께서 아이가 있는 학생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배려해주셔서 실습하지 않고 실험실 바깥에 나와있었다.
처음에는 임산부로서 걱정이 많았다. 아이를 키우는 걱정보다도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을 했다. 원활하게 진행되던 학과 시스템에 괜한 잡음이 생길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또다시 그에 맞는 시스템이 굴러가게 되어 있다. 회사에는 출산하는 엄마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육아휴직이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당연히 어린 학생들이 많고, 임산부나 엄마들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 학생들이 생기고 그 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시스템이나 문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제 다시 수능으로 바뀌면 이렇게 만들어진 시스템도 잠깐 스쳐간 피트 세대에만 존재하고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로 감사했던 학교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