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그깟게 뭐라고 내 껍질을 깨뜨리나
나이 들어서 공부한다는 것은 어릴 때 공부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 어릴 때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이 내 목표의식의 바운더리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어릴 때와 달리 나의 경험치가 많이 쌓여 있어서, 목표의식의 바운더리 또한 훨씬 깊고 넓어졌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라는 것을 시작한다. 나는 그때부터 줄곧 내가 목표로 두는 세상의 바운더리와 그에 발맞춰 나의 실력이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음을 느낀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내 모습 속에서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어 왔다.
내가 지금 나이에 아직도 학교를 다닌다고 하면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공부가 지겹지도 않니?"
아니, 나는 솔직히 공부가 지겨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내가 딱 즐길 만큼만 공부해왔기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생 때 나는 일명 학군이 떨어지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친구들이 서울의 학교로 점점 전학을 갔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학군이 좋은 곳으로 전학을 간 것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안 그래도 학생 수가 적었다. 1, 2, 3학년 때는 단 2반이 있었다. 그런데 4, 5, 6학년은 1반 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 남편이 어릴 때 살던 동네는 일반 학교가 13반까지 있었고 심지어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출산율이 떨어지는 시기도 아니었는데도 내가 다닌 학교의 학생수가 그렇게 적었던 것은 학군지로 선호되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한 학년의 학생수가 40여 명에 불과했다. 6학년 때는 추운 겨울, 난로를 교실 한가운데에 두고 책상을 빙 둘러앉아도 될 정도로 학생수가 적었다. 전교에서 2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중학교에 올라가서 알았다.
중학생이 될 때 우리 집은 그 당시에 생긴 일산신도시로 이사를 갔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중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내가 다닐 때는 반배치고사라는 명목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시험을 봤다. 선생님이 성적과 등수가 적혀있는 꼬리표를 나눠주셨다. 성적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받았던 등수는 선명히 기억난다.
‘19등’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받은 최초의 등수는 반에서 19등이었다. 신도시라서 전교생이 꽤 됐었다. 전교 등수는 아마 몇 백 등이지 않았을까? 초등학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했지만 중학교는 반에서 19등으로 입학한 것이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등수가 신기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애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가 보다'라며 생각했었다.
우리 반에서 3등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공부를 잘할까?' 목동에서 이사를 왔다고 했다. 친구와 나의 격차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1등 하던 친구는 지금 말로 표현하자면 넘사벽이었다. 2등과도 확연히 차이나는 성적으로 1등을 했다. 부모님이 교수님이라고 했다. '아… 부모님이 교수님이어서 그런가?' 대단한 친구들이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족한 내 등수를 올리려고 공부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은 먹고살기 바쁘셔서 내 성적에 관심이 없으셨고, 나는 공부방법조차 제대로 몰라서 다음 시험을 준비하고, 또 다음 시험을 준비하면서 그냥 내 갈 길을 갔던 것 같다. 사회과목을 공부하던 날이 생각난다.
'임진왜란은 1592년 5월 23일(조선 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부터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까지 7년간 조선과 명나라 대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전쟁의 주 무대였던 조선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더 나아가 명나라와 일본 등 16세기~1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든 국제전이였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에 관한 이런 문장이 교과서에 있다고 할 때, 시험대비를 위해서는 '임진왜란, 1592년, 7년간' 이렇게 공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부방법을 몰랐다. 국영수는 학원에서 가르쳐줬지만 사회과목은 가르치지 않아서 스스로 공부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나는 키워드 위주로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서 임진왜란'은'이라는 조사까지 외우려고 했다. 사회는 외우는 과목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야말로 문장 전체를 외우려고 했다. 중요한 것만 외워야 효율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문장 전체를 외우려고 했으니 얼마나 외워지겠는가. 결국 사회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 정도로 어리바리했지만 그러면서 나만의 공부방법을 터득해갔던 것 같다. 중3이 되었을 때는 내가 쳐다도 보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반에서 3등 하던 친구와 성적이 엇비슷해졌다.
그 당시 일산은 비평준지역이어서 고등학교 사이에 성적으로 매겨진 서열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미리 원서를 내고 입시시험을 쳐서 입학해야 했다. 나는 가장 좋은 고등학교와 그다음 고등학교 사이에 성적이 걸쳐 있었다. 그런데 내신성적이 좋지 않았다. 내신 성적이 계속 좋아지긴 했지만 처음에는 반에서 19등을 할 정도의 성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원의 같은 반 친구들은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는데 나는 그렇지 못해서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는데 딱 지금 학교에 갈 점수를 받았다. 가장 좋은 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더라면 떨어질 수도 있는 점수였다.
애매한 성적에서 두 번째 학교를 택한 덕분에 고등학교에 가자마자 전교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축에 속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만 해도 반에서 중간 성적에 그쳤던 내가 그렇게까지 성장한 것이다. 반에서 3등 하던 친구와도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 친구보다 공부를 잘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성적이 좋았지만 학생수가 워낙 적었다. 더 넓은 세상에 나오니 내 성적은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내 성적은 계단식으로 계속해서 성장했다. 그 와중에 알게 모르게 자신감을 쌓아갔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수학 시간이었다.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수학 잘하니?" 선생님이 친구에게 물어보셨다. “세나요~”라고 친구가 대답했다. 그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누군가에게 공부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명문대라 불리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는 중학교를 반에서 19등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남편은 중학교를 1등으로 입학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은 과학고등학교를 입학했다. 어릴 때는 과학고등학교가 천재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교 1등 하던 내 친구 오빠도 과학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니 과학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했다. 나의 여건에 맞춰서 나의 공부를 해왔는데 어느새 내 위치가 그곳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주위에 다른 대학생들의 과거 성적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이런 자신감들이 쌓여서 명문대라는 곳에 입학했지만 한편으로 스스로 깨지 못한 껍질이 있다는 것을 약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깨달았다. 예전처럼 내 여건에 맞춰서 즐기면서 공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피트 시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초시에서 제대로 낙방을 했다.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됐었다. 고등학교도 수능으로 결단을 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3년에 걸쳐 공부습관을 잡고 지식을 쌓아가는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피트 시험은 달랐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를 이기는 공부를 해야 했다. 이기지 못하면 불합격만이 불명예스럽게 나를 기다린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잠을 이기며 공부해 본 것이다. 잠을 쫓아내며 공부한다는 것... 고등학교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졸리면 그냥 잤다. 깨어있는 시간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트 시험은 시간을 다투는 시험이었다. 나를 이기는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실력이 단기간에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몰랐던 문제를 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초반에는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피트 공부도 즐기면서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꼽아보라면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 즐긴다. 하지만 나의 단점을 꼽아보라면 ‘즐기는 만큼만 하는 것’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만뒀다. 깨어있는 시간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나를 이겨볼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나의 껍질을 깨 보는 경험을 피트 시험을 공부하면서 해본 것이다.
그래서 내게 33살 약대 입학이 큰 의미가 있다. 내게 새로운 용기를 줬다. 나는 끈기도 없고 최선을 다하지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방법을 몰랐고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부푼 마음이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 안에 가득 쌓여갔다.
약대에 들어와서 두 아이를 출산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또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지금 글쓰기 또한 그렇다. 분명히 즐길 줄 아는 태도는 나의 큰 강점이다. 새로운 배움들을 즐기고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공부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을 33살에 약대에 입학하면서 깨달은 바다. 하지만 어떤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는 것도 30대에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즐길 줄 아는 삶의 태도, 거기에 나를 이겨보는 노력이 더해져 내 삶은 30대에 와서 훨씬 풍성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