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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장하트 Sep 04. 2023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러도.

생존 아이템

심심하던 주말 저녁, 친구(남편)와 창고형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 나갔다.

잎이 넓은 뱅갈고목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화분을 살 생각은 없었지만, '나 이쁘죠? 델고가세요.' 하며 나뭇잎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남편)에게 카트에 담아달라고 부탁을 한 후, 계산대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휴... 너무 좋다. 잎이 아주 좋아 보이네" 뒤에 계시던 70대 정도의 어머님이 말씀을 하셨다.

"그렇죠? 어머니! 가격도 좋아요. 저도 오늘 화분 살 생각이 없었는데, 좋아 보여서 담았어요"

"어머... 어머님도 고기 너무 좋은 거 사셨네요." 나는 대답을 했다.

"어쩜, 애기 엄마는 그렇게 이쁘게 말을 해." 

"아이고, 어머님이 이쁘게 봐주시는 거예요. 감사해요"


남편은 주차장으로 올라와, 차에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우리 성희는 어른들이 다 좋아하시네"

"나도 알아. 나는 어디를 가든, 만나는 어른들은 나를 다 이뻐하셔. 내 부모와 당신 부모만 빼고..."





"누구네 며느리 될지 너무 좋겠다."

"어쩜 그렇게 야무지게 말을 하고, 이쁠 수 있지"

대형병원에서 13년 정도 간호사로 근무했던 내가 일하면서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가장 많이 듣던 말들이다.

일반 병동에서 4년 정도 근무를 하다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VIP 병동으로 부서를 이동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빅 3 병원이었던 곳의 VIP 병동에서 내가 만나게 된 환자들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몇 개월 정도를 근무하고, VVIP 병동으로 한번 더 이동하게 되었다.

신문이나 TV에서 보는 사람들을 내가 환자로 대해야 했다.

아마도 나는 그곳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 좀 더 다듬어지고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가족들에게 대화하는 법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성숙되지 못한다.

세 번째 순서인 나는 부모에게 떼를 써본 적이 없다. 

이미 어려서부터 내 것을 쟁취하기보다는 포기하는 일이 더 쉽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리광이나 떼부리 기는커녕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중학교 때, 나에게도 사춘기라는 게 왔다.

반항과 호기심이 반반 섞여서,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러봤다.



"아줌마, 오늘 반찬은 뭐예요?"



차라리 혼나기라도 했다면, 엄마가 내 말을 듣고 있구나하며 안심했을지 모른다.

엄마는 내게 화를 내지도, 웃지도,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어보시지 않았다.

이후로 며칠 동안, 나는 계속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어느 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혼자서 큰소리로 막 떠들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 '퍽'하는 느낌과 함께 눈앞이 깜깜했다. 아빠가 나의 머리를 때리셨던 거였다.

아빠는 선생님이셨는데, 당시 여고에 재직 중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종일 여자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으셨을 것 같다.

그런데 퇴근을 해서 집에 와도, 세명의 여자애들이 조잘거렸을 테니 소음으로 밖에 안 들리셨을 것 같다.

나는 아빠의 그런 상황을 이해할 만큼, 성숙한 중학생 여자아이는 아니었다.

너무 화가 났고, 수치스러웠고, 아팠고, 절망했었다.

이후로 마음속에서 아빠와 엄마와 멀어지기로 했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가족들에게 특히 아빠와 엄마에게 예쁘고 예의 바르게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내 마음과 다르게 삐뚤게 내뱉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아무튼 밖에서는 살아남아야 했으므로 상냥하고, 싹싹하고, 잘 웃고, 쾌활한 캐릭터를 만들었다.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모르면서, 조울증의 환자가 우울과 조증을 넘나드는 것처럼...

밖에서의 나와, 안에서의 나는 점점 더 깊이의 차이가 생겨버렸다.



"애가 키가 너무 작아요"

서른 살이 넘어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싫었다.

지금의 남편은 친구였다. 고3 수능이 끝나고, 친구의 친구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이십 대 후반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결혼을 하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시어머님들이 그런 것처럼, 나의 시어머니도 그런 분이었다.

내 키는 정확히 159.8cm로 작은 편이지만, 우리 시대는 아담하다고 표현했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우리 부모님께 "애가 키가 너무 작아요"라고 말씀하셨다.

키가 아니라, 그냥 맘에 안 든다는 말씀이셨을 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아빠와 엄마는 그 말에 신경을 별로 안 쓰셨다.



그래도 며느리로서 인정받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 나름 몇 년 동안 노력이라는 걸 했다.

나의 가장 큰 무기인 '눈치와 센스'를 발휘해서 최대한 밝은 모습으로 웃고, 먼저 대화를 시작하고, 선물을 준비하고, 소위 '며느리 노릇'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시댁 식구들에게 나는 말이 많고, 유난스럽게 여우짓을 하는 미운 사람이었다.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들이 돌아갔고, 늘 예상하지 못한 엔딩으로 나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3년 정도의 노력 후에 내가 깨달은 건, 아무리 노력해 봐도 시부모님께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노력도 하지 않기로 했고, 이후로 나는 '나쁜 며느리'가 되었다.

내가 종종 나에 대한 '연민'에 빠지게 되는 대목이다.






"왜 그렇게,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지?"

"네가 예민하기 때문이야. 그냥 잊어버려"

타인들이 나에게 위로하는 말들이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결국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억울할 때가 있다.

내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일이 내 잘못이라고 한다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래도, 사랑이라는 건 주고받는 상호적인 감정 아닌가.

중년의 나이에 아직도 태생이나 환경, 가족들에 대한 원망을 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그분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에서 못 받은 사랑을 달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누군가는 빨리 뛰다가 넘어졌을 때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반면, 누군가는 천천히 걷다가 넘어졌는데도 한참을 엎드려서 울 수도 있다.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를 이해하려고 안아주고 싶은 것뿐이다. 나도 받아들이고 싶은 거다. 


내가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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