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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장하트 Jul 01. 2024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머니와 녹두

인간엄마랑 산책을 나간다.

나는 크나큰 대형견이므로, 오늘도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얼굴은 바닥을 쳐다보며 자리를 잡고 탄다.

인간들과 눈을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대형견이기 때문이다.


 

"땡!" 소리와 함께, 19층에 사는 할머니가 타신다.

'녹두다' 나는 냄새로 알아챘지만, 쳐다보지 않는다.

녹두는 레드브라운 칼라의 털을 가진, 두 살짜리 푸들이다.

인사를 하고 싶지만, 나는 대형견이므로 내가 쳐다보면 '왕왕' 거리며 짖어댈게 뻔하기 때문이다.


"노옥뚜~~!! 안뇨옹~~" 인간엄마가 하이톤의 고음과 혀 짧은 발음으로 인사를 한다.

(가끔, 인간엄마는 동물들한테 말할 때 왜 저런 말투를 해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층 할머니는 원래 할아버지가 계셨다.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셨다.

산책을 나갈 때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할머니를 만나면 얼굴과 머리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안정 시 진전(resting tremor)을 볼 수 있었다. 파킨스병(Parkinson's disease)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대형견인 나를 보며,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시기도 했지만 인간엄마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신 적은 없었다.

그러던 2년 전 어느 날, 처음으로 할머니의 웃는 모습을 봤다.

내 앞발만 한 노르스름한 강아지와 함께였다.



"꺄악~~ 너무 이뽀요. 얘 누구예요?"

"녹두예요. 5개월이에요. 내가 요즘 얘 데리고 나가기가 바빠요"

할머니와 인간엄마의 대화를 들어보니, 할머니의 자녀분들이 녹두라는 강아지를 데려다주셨고,

할머니는 녹두를 데리고 산책을 하루에 3번 나간다고 하셨다.


(음... 긍정적이군. 파킨스병 환자는 자꾸 움직여야 하는데, 녹두라는 저 강아지 덕분에 할머니는 산책을 자주 하게 되었군. 하...근데, 또 할머니의 남은 시간과 녹두의 시간이 엇박자가 날수도 있는데...)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발바닥만 한 녹두는 두 살이 되어 내 머리통만 해졌다.

할머니는 산책을 자주 나가시다가, 동네 산책모임까지 갖게 되어 이웃 사람들과 친목도 다지며 녹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는 것 같았다. 점점 사회활동이 넓어지고, 다양해지시면서 바쁜 날엔 녹두를 유치원도 보낸다고 하셨다. 신기하게도 녹두는 점점 할머니를 닮아갔다. 똥그란 눈, 살짝 찌푸린 미간, 종종거리는 발걸음...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는데, 진짜 가소롭지만 귀여워서 봐준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인간엄마랑 풀냄새를 맡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할머니와 녹두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웬일인지, 나를 보고도 으르렁거리지 않았고 할머니가 녹두를 안고 있었다.


"노옥뚜~~오데가요? 왜케 다운되이떠..?"

(또 반토막 혓바닥이다)

"어제저녁부터 이상해. 설사를 몇 번 했는데..."

"에이... 날씨 더워져서 그럴 수 있어요. 애들 더우면 그러더라고요. 한두 끼 굶겨보시지 그래요"

(인간엄마, 자기가 또 반의사다. 나는 대형견이니까 한두 번 설사는 괜찮은 거지.. 이 사람아... 쯧쯧)

"아니..... 아침엔 붉은색도 봤어. 이상해. 병원 가는 길이야"

"어머!!! 얼렁 다녀오세요. 괜찮을 거예요"

할머니가 1층에서 다급히 내리셨다. 시계를 보니 아직 9시가 안 된 게 병원은 문도 안 열었을 시간이었다.

아마도 할머니는 병원 앞에서 기다리시려고 하는 것 같다.



할머니의 뒷모습에 찡한 작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녹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할머니에게는 녹두가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겠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머니 곁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데워주었을 녹두가 대견스럽게 보였다.

인간의 나약함을 다시 한번 알겠다. 

인간은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더불어 살 때 비로소 행복한 사회적 존재이다. 

물론, 우리 같은 동물과의 유대관계를 사회적이라 말할 수 없겠으나 우리를 통해서 인간사회로 나가게 되니까 하는 말이다. 부디, 녹두는 그냥 더위를 먹어서 잠시 탈이 난 해프닝이기를 바란다.

종종거리며 산책 나가는 할머니와 녹두의 뒷모습에 웃을 수 있는, 또 다른 날의 아침을 기도한다.


그리고, 인간엄마야. 더위는 털옷 입은 내가 먹을 것 같아. 오늘 저녁엔 닭 한 마리 푸욱 삶아주는 게 어때?



[ 더운 여름 아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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