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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 Dec 09. 2018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마을

델리로부터

델리 공항.

그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3주만이었다. 고작 며칠을 보고 3주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건데도 아주 오랜,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Good to see you, Sue.

그래,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가워, 패트.


인도와 델리와 색색의 천과 빨래들 @까만


델리에서 며칠간 여행을 준비했다. 
오토바이를 빌리고, 헬멧이며 가죽재킷이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오토바이에 싣기 어려운 짐들을 우체국에서 부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동안 계속 비가 내렸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비가 축복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축복이 드디어 멈춘 날 이른 아침, 우리는 가벼운 배낭 두 개를 오토바이 양쪽에 매달고 여행을 시작했다. 버스와 택시, 릭샤와 소가 뒤엉킨 도로에서 오토바이에 매달려서 델리를 빠져나가려 애쓰는 동안 헬멧은 답답하고 오토바이 뒷좌석은 몸을 금세 뻣뻣하게 만들었다.

패트는 내게 지도를 건넸고, 앞으로 몇 주간 나를 태우고 다녀야 할 그를 위해 지도만은 제대로 들고 있고 싶었지만 자꾸 바람이 불어서 지도가 이리저리 펄럭거렸다. 갈림길이 계속해서 나오고 패트는 그때마다 “This way or that way?”라고 물었다.

나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커녕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잠깐만”을 반복하면서 애꿎은 지도만 이리로 접었다가 저리로 펼쳤다가 했다. 오토바이 여행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시작부터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오토바이에는 행운을 빌어주는 꽃목걸이와 작은 배낭 두 개가 매달려 있었다. @까만


오후 3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7시부터 내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왔고, 오전 9시에 길 한복판의 작은 식당에서 달리와 짜파티를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으므로 식당을 찾아야 했다. 비가 계속 내릴 경우, 끼니를 해결한 후 바로 숙소에 들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도로에서 길을 꺾었고,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너무나 작아서인지 우리가 들고 있는 지도에 나와 있지 않았다. 급히 가방에서 론리플래닛을 꺼내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는 마을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갑자기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조금 더 오토바이를 몰아서 지도에 나와 있는, 그래서 식당과 숙소를 찾을 수 있는 마을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빗방울은 더 굵어지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들어선 마을은 예상했던 대로 작고 허름하고 낡은 곳이었다.

헬멧 유리에 빗물이 탁탁 부딪혔다. 빨리 끼니를 해결할 곳과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외부인도 찾지 않는 곳인 것처럼 작은 식당조차 찾을 수 없었다.

패트는 마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잠시 오토바이를 멈추고 “Dhaba(인도식 작은 식당)?”라고 물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한 곳을 가리켰다.

“And hotel?”

역시나 사람들은 같은 곳을 가리켰다.

그들이 가리킨 곳을 향해 길을 틀면 틀수록 길은 점점 좁아졌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사람들은 우리가 뭘 찾는지 몰랐던 거야."

패트는 길을 돌려서 나가자고 했다. 그때 우리 눈앞에 성문이 나타났다.


거대한 성문 너머로 큰 성의 꼭대기가 보였다. 이게 뭐지? 그때까지도 우리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해하면서 우리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열린 성문 틈으로 들어섰다.

맙소사.

성문이 열리고, 동화 속에서나 보아 왔던 성이 펼쳐졌다. 초라한 시골 마을의 한가운데 말이다. 흡사 비를 맞은 오토바이 여행객을 위해 하룻밤만 존재하는 신기루처럼.     


지도에 없는 마을에 있는 성 @까만


목까지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검은색 차이나 칼라의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달려 나와 우리의 짐을 들어주고는 성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높은 천장, 우아한 무늬의 소파, 한쪽 벽에 전시된 기사의 갑옷들과 창.

그 사이로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자가 양팔을 뻗으며 걸어 나오더니 “Welcome”이라고 말했다. 그는 훌륭한 영어로 성에 대해서 소개했고, 그중에서는 가장 작았지만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비싼 방을 권했다.

검은색 차이나 칼라의 ‘집사’가 기다란 복도를 지나 안내해준 방은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곳이었다.

우선 방은 여러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그 공간을 나누는 것은 나무문과 중간이 뚫려 있는 아치형 문들이다. 첫 번째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거실이 있고, 다음 아치형 문을 지나면 커다란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는 방이 있고, 또 하나의 아치형 문을 지나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 끝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그 화장실은 그날 아침에 떠나 온 방과 크기가 비슷했다. 이 모든 공간의 벽과 천장에 핸드페인팅으로 손가락만 한 푸른 꽃이 가득 차 있었다. 커다란 창문에는 두껍고 부드러운 천의 커튼이 풍성한 술이 달린 금색 밧줄로 묶여 있었고, 테이블과 의자, 거울과 침대는 모두 정성스럽게 조각된 가구들로 반짝반짝 윤이 났다.

“맙소사. 이건 정말 동화 속이잖아.”

우리는 7시간 동안의 먼지와 빗물을 뒤집어쓰고서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어딘가에 서서 그 순간을 이리저리 오갔다.     


아침.

비는 말끔하게 개 있었고, 우리는 작은 마을을 산책하러 나섰다.


눈이 커다란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길에 우리를 보고 웃었다.  

소를 끌고 나가려던 가족은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대문 앞에 섰다.

예쁜 사리를 걸친 할머니가 지나가는 우리를 불러 세우고는 집 안에 있는 아이를 크게 불러내 인사시켰다.

마을의 모두가 이방인인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수줍은 미소로 듬뿍 반겨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내 카메라를 향해 손짓을 했고, 나는 수십 명의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화면 속 사진을 보여주면 모두가 활짝 웃었다.  @까만


녹색 사리를 걸친 아름다운 여자가 우리의 손을 붙잡고 들어와서 차를 마시고 가라고 권했다. 여자는 반짝이는 뱅글을 여러 개 걸친 손목으로 커피 물을 올리고는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반쯤 무너진 옥상 아래서, 색색의 천을 하나 걸쳐 만든 인도식 침대에 앉아 여자가 그 짧은 시간 바지런하게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마당을 쓰는 것을 보았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내자 여자는 다시 바지런하게, 동시에 서두르지 않고 커피를 타서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달짝지근하고 따뜻한 커피였다. 여자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고맙다는 표시로 양손을 모으고 몸을 깊게 숙였다. 여자는 아름답게 미소 짓고는 다시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마음이 시렸다. 너무나 아름다워서였다.

그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알았다. 꿈이었다. 손에 잡힐 수 없는, 아름다운 여름밤의 꿈. 
이 마을은 꿈처럼 너무나 아름다워서 지도 책자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꿈 @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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