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엠립
그와 처음 만난 날 나는 친구에게 메일을 보내 캄보디아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그에 대해서도 말했다.
호주 사람과 한 명 이야기하게 됐어. 보통의 서양인들이 그렇듯 나이를 알 수 없어. 곱슬머리이고, 선량해 보이는 파란 눈을 하고 있어.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 이상으로 그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의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에서는 그 모든 것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매 순간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나,
다음날 우리는 같이 툭툭을 타고 외곽의 사원으로 향했다. 툭툭을 타고 가는 동안 우리는 당연히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서 말이 막히자 그가 대신 난감해하며 말했다.
“미안해, 네 언어를 할 줄 몰라서.”
그는 자신의 언어로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내게 한국어를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한 외국인은 그가 처음이었으므로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둘,
다시 툭툭을 타고 돌아오는 길, 그가 내게 자신이 발견한 마사지 가게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블라인드 마사지’라는 상호를 내걸고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거기까지 우리를 데려다준 툭툭 기사는 우리를 황급히 말리면서 가지 말라고 했다.
“여기는 나쁜 곳이에요. 다른 곳으로 가세요. 여기는 좋지 않아요.”
“왜요?”
그가 건물 쪽으로 향하던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여기는 장님들이 하는 곳이거든요.”
“그건 알고 있어요.”
나는 툭툭 기사가 보인 편견이 너무나 진부해서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툭툭에 몸을 기대면서 다시 물었다.
“그게 왜 나쁘다고 생각해요?”
툭툭 기사는 머쓱했는지 양어깨를 들어 올려 보였다.
“왜 장님이 하는 마사지를 나쁘다고 생각하죠? 아니면 장님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는 그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툭툭 기사가 가진 편견에 대해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편견을 그저 낡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툭툭 기사의 편견에조차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거였다.
툭툭 기사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자신의 툭툭으로 돌아갔다. 그와 나는 툭툭이 출발하는 것을 보고 건물로 들어갔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의 흰자가 우리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셋,
며칠간 그도 별다른 일정이 없었고, 나야 더 말할 것도 없이 할 일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펍스트릿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얼음이 가득 담긴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던 우리에게 두 명의 여자아이들이 다가와 엽서를 내밀었다.
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는 이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문제였다. 처음에는 얼마간의 돈을 건네기도 하고, 일부러 과자나 사탕을 사 두었다가 작은 손에 쥐어주기도 했지만 내가 그럴 때마다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목표물이 되어 구름 떼와 같은 아이들을 끌고 다니게 되었다. 엽서 등의 기념품을 파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몰차게 물리칠 수 없어서 열쇠고리를 들여다보았다가는 서로를 밀치면서 내게 물건을 내보이는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게 되는 거였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싸우고 울고 난장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모든 순간들이 고통스러워서 나는 그와 내게 엽서를 건네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열 살이 갓 넘었을 것 같은 작고 검은 여자 아이 두 명이 조악한 그림의 엽서를 내밀고 2불이라고 했다.
그가 내게 엽서가 필요하냐고 묻더니 나를 대신해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엽서가 필요하지 않은데.”
상심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가 싱긋 웃었다.
“대신 신발이 하나 필요해. 내가 신발 사는 걸 도와주면 치킨을 사줄게.”
여자애들은 눈을 반짝이며 끄덕거렸다.
우리는 같이 시장을 찾았다.
그는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를 찾고 있었다. 여자애들에게 길에 선 차의 타이어를 가리키면서 신발의 밑창을 가리켰다. 아이들은 서로 얼마간의 토론을 거친 후에 똘똘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끄덕거려 보였다.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아이들은 바쁘게 우리를 이끌었다.
“No shoes, no chicken!”
그가 아이들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외쳤고, 마음이 급해졌는지 아이들은 뛰기 시작했다. 우리도 덩달아 아이들을 따라 시장의 골목을 뛰어다녔다.
아이들로서는 마지막이었던 신발가게에서도 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찾을 수 없자, 아이들은 몹시 낙심한 얼굴로 우리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눈빛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상심한 얼굴이었다.
“자, 이제 내가 너희들의 노동에 값을 치러야겠지? 내 신발을 구한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으니 치킨을 먹으러 가자.”
아이들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와 함께 펍스트릿의 식당에 들어서자 얼굴이 환해지면서 메뉴판에 머리를 파묻고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양손에 닭을 들고 허겁지겁 뜯어먹었고, 우리는 천천히 먹으라고 계속해서 주의를 주어야 했다. 그는 몇 번이고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타이어 신발을 구하러 시장을 뒤지고 있었을 거라고.
“거지를 먹이다니 당신들은 훌륭한 사람이네요.”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를 지켜보던 점원이 계산대에 선 우리에게 말했다.
“이 아이들은 거지가 아니에요. 제가 신발을 사는 것을 도와줘서 저는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 것뿐입니다.”
그가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점원은 캄보디아어로 아이들에게 무언가 물었고, 아이들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날의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서 나는 아이들이 지었던 자랑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그건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구걸하는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을 몰라 그들끼리 싸우고 울게 만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아이들이 적선이 아니라 대가를 받게 만들어 주었다.
No shoes, no chicken.
나는 혼자서 끄덕거렸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그에게서 보았던 것은 그때까지 나를 혼란스럽게 한 삶의 면면들에 대한 대답이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정당하지 않은 위계질서와 편견, 위선이 그를 통해 소리 없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활짝 웃는 얼굴로, 장황한 말 없이, 솔직하게 손을 내미는 방식으로 해냈다.
그저 웃으면서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그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 편견을 대하는 방식, 약자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내가 그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몰랐다. 단지,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게 언제가 될지, 어떤 방식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