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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 Jan 13. 2019

내일 헤어지는 사람을 사랑할 때

언제부터였을까.

그를 사랑하게 된 건.

그저 친절하고 좋은 친구였던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진 건.

헤어지는 날이 다가오는 것에 가슴이 아리기 시작한 건.  

   

어쩌면,


만다와의 길로부터

“넌 참 달라. 멋진 것 같아.”

만다와의 하벨리를 구경하며 걷다가 패트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너와 함께 인도에 가겠어’라고 말한 거 말이야. 멋졌어. 정말 멋졌어.”   


비카네의 식당으로부터

달을 앞에 두고 나는 패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패트는 고개를 저었다.

“계획 같은 건 없어. 그냥 언젠가 너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어. 그게 지금 원하는 거야.”

패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다야.”     


조드푸르의 숙소로부터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사람과 붙어 있던 적이 없어서 미칠 것 같지만 그 미칠 것 같음에도 적응이 되어 갔다.

계속해서 수다를 떠는 패트에게 나는 “딱 1분만 닥쳐 줄래?”라고 말한다.

여드름이 난 내게 패트는 “여드름엔 비누를 바르는 게 맞아. 내가 언제 너한테 안 좋은 일을 권한 적 있어? 한번이라도?”라고 말한다.

차 좀 보고 다니라고 소리치는 패트에게 나는 “그래서 내가 지금 차에 치였어?죽기라도 했느냐고.”라고 말한다.

룸 열쇠를 잊은 내게 패트는 “왜 내가 널 위해 모든 걸 해 줘야 돼?”라고 말한다.

알람을 맞추는 패트에게 나는 “딱 30분만 늦게 일어나자는 거야. 점심에 출발하자는 게 아니라고.”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토바이에 오르는 것이다.     


자이살메르의 거리로부터

자이살메르의 분주한 거리를 패트와 같이 걷고 있는데 우리 쪽으로 걸어오던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소리쳤다.

“아, 너는 행운을 가졌구나. 이 남자는 정말 좋은 남자야.”

그리고 그는 휙 사라졌다.

다음날 우리는 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이 남자는 너의 real lover야.”

남자는 여전히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다음날, 우리는 비슷한 곳에서 그를 또다시 만났다.

“이 관계를 더 강하게 만들도록 해.”

남자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길의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델리의 서점으로부터

패트가 들뜬 얼굴로 내 손을 이끌었다. 그곳은 작은 책방이었다. 내가 인도 여행 내내 찾았던, 바로 그, 책방이었다.

언제 그곳을 찾은 건지, 나는 무척 감동다. 그리고 그곳을 가득 메운 책이 너무 좋아서 정신없이 힌디어 활자들 사이를 쏘다녔다.

내가 책을 둘러보는 동안 패트는 점원에게 작은 소리로 ‘한국어 책’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우리가 싸울 때면 나는 “네 언어만을 강요하는 건 너무나 게으르고 무례한 일”이라고 몰아붙이곤 했다. 그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던 패트는 언어를 공평하게 사용하자는 우리의 약속을 지킬 셈으로 보였다.

패트는 한국어 CD를 몸 뒤편에 숨긴 채 책방을 나왔다.

나는 튤립꽃이 자라는 이야기를 담은 작은 힌디어 그림책을 샀다.

튤립처럼, 무언가 벅차오르는 것이 내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 같았다.     


델리의 길바닥으로부터 

다음날 시내, 인터넷 카페에 들렀다 나오니 나를 기다리던 패트가 길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다.

한낮의 볕 속에서, 얌전한 개처럼, 털이 고운 소처럼 나른하고 느긋하게.

그 모습을 보니 단번에, 성큼,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내 안에 들어왔다.

인도의 거리에 누워 자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 어쩌면 그 모든 순간들로부터,


그리고,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말았다.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난 정말이지 울 것 같았고, 패트 역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대답 대신 내 얼굴에 입을 맞추며 나를 안았다. 그 ‘나도 너를 사랑해’의 감동이 아니었고, ‘아, 네가 드디어 그것을 말하고야 말았구나.’라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우린 한참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아니, 네가 곧 말하리라는 걸 느꼈어.”

“그리고 넌 무서워했겠지.”

“모든 남자들은 사랑을 무서워해.”

“무서워하지 마. 나는 내일 한국에 돌아가니까.”

“그게 무서운 거야.”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어떻게 알아?”

“난 알아.”

“신이구나.”

“몰랐어?”

“신이 한국인인 줄은 몰랐어. 유대인인 줄 알았어.”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I'm in love with you, too.”

패트가 너무나 담담하게 말해서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직원처럼 말하네. 네, 네, 알겠습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걱정 마세요. 네, 네.”

패트도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알아. 나는 너를 아주 조금은 알지.”

“아주 조금보다는 더 아는 것 같아. 그냥 조금?”

우리는 그렇게 농담을 나누었다.


농담.

내일 헤어지는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에 빠졌고, 내일 헤어질 것이고, 그래서 계속 농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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