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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코로나 확진자와 보호자로의 9일간의 삶

감사와 치유의 시간

by su

전세계적으로 3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코로나는 아직도 변이를 하며 진화하고 있다. 작년 10월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 때는 코로나 테스트를 해서 음성이 나와야 박물관이나 실내 명소를 들어갈 수 있었고 2G, 3G 등 규제를 하며 방역을 했었다. 그러나 4월부터 실내에서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고 안내가 왔다. 지난주까지는 마트나 상점을 갈 때 우리나라로 치면 KF94를 안 쓰면 입장이 불가했다. 그러나 이제는 실내에서 마스크를 안 써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독일도 코로나가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부터 3개월 전쯤 일이다. 나도 코로나에 걸렸었다. 처음 코로나에 걸리고 회복하는 과정에서는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다.


나는 일요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가족을 위해 모닝빵을 만들고 함박스테이크로 햄버거 패티를 만들어 아침을 준비했다. 나는 12월의 추워진 날씨 탓에 늘 따뜻한 감기 차를 끓여놓고 가족을 깨운다.

남편은 햄버거를 한 입을 먹더니 아무 맛이 안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안하다며 방으로 가 코로나 테스트기로 테스트할 테니 테스트기를 달라고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두 줄이 나왔다. 순간 둘째는 울어버리고 큰애는 당황을 하고 집에 정적이 흘렀다.

남편은 얼른 공항에 있는 코로나 검사소를 가자고 했다. 그때는 일요일은 검사소가 여는 곳이 없었고 당시 독일은 하루에 확진자가 7~8만 명이 나오고 있어 검사를 해도 2일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공항을 가야 제일 빨랐다. 공항을 가는 내내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를 내려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순간 내가 저 사람들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이라 코로나 검사 줄이 길지는 않았다. 얼른 검사를 하고 하루 뒤에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독일은 PCR 검사를 하면 69유로를 자비를 내야 한다. 4명이 했으니 276유로를 결제하고 검사를 했다.

집으로 와서 남편은 바로 지하방으로 갈 테니 샴푸나 로션, 옷 등을 넣어달라고 했다. 나는 남편 짐을 넣어주는 동안 큰 애는 둘째에게 사탕을 주며 맛이 느껴지냐고 맛이 느껴지면 코로나가 아니니 안심하라며 둘째를 다독여주었다. 정말 고마운 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엄마는 집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지나 PCR결과가 나왔다. 결과도 빨리 나왔다. 6시간 정도 지나서 결과가 나왔는데 우선 큰 애는 음성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나왔다. 그러나 남편이 둘째 지하방으로 내려 보내란다. 둘째도 확진이란다. 나는 정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살면서 제일 가슴이 아플 때가 자녀가 아플 때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다.

나는 얼른 큰 애에게 마스크를 쓰라고 하고 둘째에게 해열제와 체온계를 주고 내려보냈다. 둘째는 안 가겠다고 울었지만 다독여서 보냈다. 울며 내려가는 모습에 눈물이 너무 났다. 큰 애도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내 결과만 남았는데 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한참 뒤에 나는 음성이란다. 정말 다행이었다. 부모 둘 다 아프면 누군가는 아이들을 건사해야 하니 우선 내가 음성이니 뭐든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바로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 해줄 테니 걱정 말고 지하방에서 쉬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내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큰 애에게 우리도 거리두기를 하고 마스크를 쓰고 있자고 했다. 모두가 다 나으면 그때 안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아이들과 스킨십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많이 안아주는데 못 안아주니 미안했다. 큰 애는 고학년이라 말귀도 다 알아듣고 내 말에 다 따라줬다. 심지어 우리는 먹는 물도 다 따로 먹었다. 정말 다행인 건 화장실이 2개라 큰애가 1층을 쓰고 내가 2층을 썼다. 겹치는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스쿨버스와 학교에 메일을 썼다. 아이들이 학교를 갈 수가 없는 이유에 대해 썼다. 쓰면서 눈물이 났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메일을 다 쓰고 나는 남편과 둘째, 큰 애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간도 안 보고 음식을 했다. 이 와중에 감사한 것은 내가 간을 안 보고도 음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과 둘째의 식사, 큰 애의 식사를 따로 다 챙겨주고 나니 밤이 되었다.

나는 큰 애를 재우고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우선 내일 해가 뜨자마자 마트에 가서 먹을 것을 사고 해열제나 두통약, 소독약 등을 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확진자는 못 나가지만 음성인 사람은 나갈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나는 불안한 마음에 새벽에 외교부에 긴급히 전화를 했다. 혹시 밤에 남편이나 둘째가 아프면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지 병원 입원은 되는지 등 독일 코로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음성이라도 나가면 안 되는데 내가 나갔다가 벌금이나 안 좋은 일을 겪으면 안 되니 차근차근 생각해야 했다.

외교부에서는 코로나 관련해서는 독일 주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 주의 영사관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걸어 나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내 전화번호를 남겨두었다. 여기는 우리 가족만 있기 때문에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다행히 나는 나갈 수 있단다. 독일은 한국처럼 코로나가 걸렸다고 동선 파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가격리 해지되었다고 연락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4일 후에 보건소에서 전화가 올 것이고 안 올 수도 있다고 했다. 6일이나 7일 뒤에 백신을 맞은 사람이나 증상이 없는 사람들은 한 번 더 테스트를 하는데 그때 음성이 나오면 자가격리가 해제란다. 중증이 되어야만 병원에 갈 수 있고 집에서 자연치료를 해야 한단다.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너무 아프면 116이나 117에 전화를 하라고 해서 저는 독일어나 영어가 원활하지 않으니 혹시 위급한 상황에 영사관으로 전화를 해도 되냐고 하자 가능하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스티커를 다 모아 다시 스티커판을 갖고 둘째가 갖고 싶었던 얼룩말까지 샀다. 둘째가 안고 자면 위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잠을 못 잤다. 7시 30분에 마트가 문을 여니 큰 애에게 엄마가 아침에 우선 먹을 것과 약국, 아빠 감기 사탕, 감기 차 등을 사러 갔다 오겠다고 했다. 큰 애에게 핸드폰 벨소리로 해놓고 조금만 있어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큰 애는 알았다고 했다. 걱정 말라고 나를 위로해줬다. 나는 정말 발에 모터가 달린 거처럼 마트를 가서 1주일치 음식을 잔뜩 샀다. 집에서 자연치유라니 먹을 거라도 매일 잘해주자는 마음이었다. 약국에 가서는 미리 찾은 독일 비상약 사진을 보여주며 약사에게 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독일어를 못해도 통할 수 있다. 소독약도 샀다. 독일은 보건소에서 오지 않기 때문에 집 소독도 본인이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동네 역 근처 마트로 가서 감기 차며 감기 사탕을 잔뜩 샀다. 혹여나 목이 아프면 안 되니 말이다. 살 때는 몰랐는데 들고 오는데 무게가 나갔다. 그래도 힘든 걸 몰랐다. 이 와중에 내가 나가서 장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만약 일요일에 남편과 내가 둘 다 확진이 되면 마트에 가서 음식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가족들을 먹이라고 마트 갈 시간을 주셨구나 싶었다.



매 끼니 다양한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간을 안 봐도 된다는 것이 감사한 순간이다.

지금도 돌아보면 월요일이 어떻게 시간이 지나간 지 모르겠다. 얼른 장을 보고 집에 와서 밥을 하고 남편 감기 차를 끓이고 나서 소독약을 안방, 둘째 방, 거실, 화장실 등 다 뿌리고 모든 이불을 다 빨았다. 큰 애와는 거리두기를 하며 알아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어느새 컸는지 마스크를 쓰며 혼자서 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둘째와 놀던 시간이 너무 그립다고 이야기를 했다. 엄마도 그렇다고 이야기를 했다.

둘째가 목이 부었는지 기침을 하는 소리가 지하방에서 들려오면 가슴이 터지는 거 같고 너무 힘들었다. 남편이 혹시 감기약이 있냐고 해서 증상대로 다 한국에서 사 왔으니 시간별로 먹이라고 걱정 말라고 줬다.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은 나의 준비성에 놀랐단다.

그중 정말 다행인 건 둘째가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다. 둘째는 어려서 그런지 후각, 미각이 살아있어서 밥을 잘 먹었다. 너무 고마웠다. 우리 집 근처에 큰 병원이 있는데 그래서 엠블런스 소리가 정말 많이 들린다. 그런 상황이 아닌 것에 너무 감사한 일이다.

뒷날 화요일이 되어 나는 혹시 몰라 라텍스 장갑과 휴지 등을 많이 사뒀다. 혹시 자가격리가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데 이상하게 나도 냄새가 안나는 거 같았다.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입맛도 없고 불안한 마음에 집에 있는 코로나 테스트기를 했는데 애매하게 두줄이다. 공항은 차를 몰고 가야 하니 걸어서 30분 되는 검사소가 있다며 남편이 알려주었다. 얼른 나는 아침식사를 주고 설거지는 남겨두고 얼른 걸어갔다. 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전날과 오늘 아침까지 장을 봤으니 우선 1주일 이상은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코로나 검사소. 다신 안 가고 싶다

생각보다 검사하러 가는 길이 두렵지는 않았다. 우선 먹을 것도 넉넉하고 백신을 맞았으니 감기처럼 지나가겠지 하는 스스로의 위안을 했다. 다만 큰 애에게만 안 걸리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검사소로 가면서 정말 큰 애에게 너랑 나랑 같이 한 공간에 있어도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한 게 이 상황에서는 신의 한 수였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검사를 하러 가서 독일어와 영어도 못하고 정말 뒤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지만 나는 당당히 QR코드를 찍고 거기에 나의 모든 정보를 넣고 검사를 했다. PCR 신청하고 검사하기까지 나의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내 뒤에 4명에게 먼저 하라고 했다. 상황이 급하니 창피함은 없었고 친절한 검사소 직원에 내가 하나씩 뭘 해서 내면 퍼펙트를 외치며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참 고마웠다.

집에 와서 내가 할 일은 큰 애를 위로해주는 거였다. 큰 애는 가족들이 자기 빼고 다 걸렸다고 울었다. 나는 큰애에게 엄마는 너라도 안 걸린 게 정말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며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결과는 뒷날 수요일에 나왔다. 근데 나의 증상은 검사하고 화요일 밤부터 왔다. 이미 후각과 미각은 잃기 시작했고 근육통이 시작되었다. 이틀 동안 밤에 근육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남편도 말은 안 했지만 나 같은 고통을 느꼈겠구나 하는 마음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감사한 건 나는 낮에는 통증이 별로 없었다. 낮에 통증이 있었다면 아이들과 남편 밥을 해주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 하나님이 밤에만 아프게 하셨다. 신기하게도 이런 상황에 그 누구도 원망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정말 감사하다 라는 마음이 컸다. 그동안 나의 교만함, 나의 잘못들을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나는 밤에 성경을 듣고 자거나 좋아하는 CCM을 들으며 잠을 청했다. 생각보다 밤에 가슴통증, 근육통이 꽤 많이 왔지만 버틸 수 있었고 잠을 청하지 못해 수면제를 먹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럼 혹시 큰 애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을까 먹지 않았다. 신기하게 자다가도 큰 애가 기침소리가 들리면 2층에서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다. 내게 초능력이 생긴 거 같았다.

아침에 되면 나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모든 창문을 다 열고 소독약과 행주를 들고 문고리며 모든 오염이 될 만한 곳에 소독약을 다 닦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가고 귀찮은 작업이지만 제일 열심히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아침을 준비하고 큰 애를 조심히 부른다. 혹시 큰 애도 아플 수 있기 때문에 제일 걱정이 되었다.

큰 애방을 청소할 때는 집 밖 잔디에 나가 있으라고 하고 방을 소독을 했다. 후각이 없었을 때 나는 소독약 냄새가 나는지 몰랐다. 일요일에 후각이 돌아오고 나서야 소독약의 냄새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큰 애는 종일 방 안에 갇혀 공부를 하거나 숙제를 하거나 하고 둘째가 지하방에서 정원으로 나오면 거실에 앉아 종이에 "힘내", "사랑해" 이런 말들을 써서 둘째를 위로해주었다. 생각해보면 큰 애가 내가 1층 부엌을 쓰니 밖에도 못 나오고 혼자 일주일 이상을 방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제일 미안했다.


목요일에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백신도 2차까지 맞고 증상이 심하지 않으니 다음 주 월요일 검사를 해서 음성이면 자가격리 해제라고 했다. 보건소 직원은 남편에게 부인이 늦게 확진이 되었으니 상태가 안 좋으면 다른 날 검사를 받아도 된다고 했다. 나만 계속 확진이면 그것도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양가 부모님, 언니, 동기간, 나의 소식을 들은 친척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셔서 다행히 일요일에 나는 후각까지 돌아왔다. 미각과 후각이 없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음식을 해도 냄새도 안 나고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미각이 돌아왔다 후각이 돌아오기까지 이틀이 걸렸는데 정말 힘들었다. 맛은 느껴지는데 냄새가 안 나니 너무 답답했다. 내가 후각이 돌아온 그 순간 첫마디가 "정말 감사합니다."였다. 매 순간 느꼈던 평범한 것들이 아프고 나니 모든 것이 감사고 은혜였다.



출근 준비 끝!!!

월요일이 되고 우리는 다시 공항으로 갔다. 확진이 되고 2번째는 무료검사이다. 검사를 하러 간 사이 큰 애 혼자 집에 있었다. 정말 묵묵히 있어준 우리 큰 딸에게 너무 고마웠다.

집에 와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3시간 뒤에 나온다는데 안 나오고 있어 마음이 떨렸다. 평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결과를 빨리 받고 나가보고 싶었다.

모두 음성이란 메일이 도착하고 음성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둘째는 얼른 지하방을 탈출하고 큰 애를 만나러 갔다. 큰 애랑 둘째는 둘이 손을 잡고 방방 뛰며 집을 뛰어다녔다. 나는 큰 애랑 둘째를 안아주었다. 정말 행복한 순간이다. 그리고 마트를 가서 장도 보고 왔다. 나갈 수 있는 현실이 너무 행복하다. 남편은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 그동안 기른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해서 내가 뒷머리는 정리해주었다. 이젠 나도 제법 머리를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남편도 이젠 나의 뒷머리 다듬는 솜씨에 만족한다.




큰 딸의 따뜻한 선물. 내가 음성이 되고 나서 받은 선물이다. 방에 혼자 있는 동안 아빠, 동생, 엄마 것을 만들었단다.

전 세계가 코로나 전쟁인 시대를 살며 이제는 누가 걸려도 이상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안 걸려본 코로나를 독일에 오고 나서 걸렸지만 잘 버티고 잘 견뎠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해주고 싶다.

한국에서 우리 가족을 위해 밤낮 기도해주신 양가 부모님과 언니, 친척분들 모두 감사드린다. 나는 코로나 확진으로 더 단단해진 엄마가 된 거 같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좋은 날도 오고 힘든 날도 오겠지만 믿음 안에서 잘 대처해나갈 수 있는 엄마, 아내가 되어야겠다. 우리 가족 모두가 건강해서 정말 행복하다.

지하방에서 둘째를 보살핀 남편과 잘 버터 준 둘째, 혼자 방에서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해준 첫째에게 너무 고마울 따름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거, 음식을 해줄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이 감사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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