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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Apr 08. 2024

사회복지 공무원에게 걸려온 전화


11월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유난히 입시생이 많은 해였다. 입시생을 가르치는 과외 선생은 늘 입시생과 같은 기분으로 산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하기에는 이만한 일이 없다. 적어도 아이 때문에 직장 동료들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은 없으니까. 그러나 좋든 싫든 함께 하는 동료가 없다는 건, 무척 외로운 일이다. 더구나 싱글맘인 나는 일에서도 가정에서도 모든 일을 혼자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드디어 기다리던 11월이 되어, 고3 학생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한숨 돌리던 차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자신을 구청 사회복지과 직원이라고 소개하는 남자는 내게 정은우 씨 맞으시냐고 묻는다.


“정은우는 제가 아니고 우리 아들인데요.”


복지과 직원은 아이의 아버지가 지난 10월 사망했는데, 연고자를 찾지 못하여 3주간 대학병원 안치실에 있다는 말을 전한다.

죽었다는 말도 기가 막힌데, 3주나 안치실에 있다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사인이 뭔가요?”


그건 전화로 얘기해 줄 수 없단다. 사회복지 담당자가 원하는 건 시신 처리를 할 수 있도록 동의서에 사인을 해 주든지 시신을 데려가든지 하라는 거다. 나에겐 이미 남이 된 사람이다.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 단지 아이의 대리인에게 요청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제 연락을 하신 거죠?”


사회복지과 직원은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기 난감해하더니, 상급자를 바꿔주겠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자신을 계장이라고 소개하고는,

가장 먼저 네 살 때 헤어졌다는 친모에게 연락했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외면했고, 다음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연락을 끊고 살았던 두 번째 새엄마에게 연락했지만 다른 친척들에게 말하라고 하며 외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청에서는 가족 이외의 친척은 확인할 수가 없다고.

다시 그의 첫 번째 새엄마가 낳은 배다른 동생에게 연락했는데, 그는 일련의 상황들을 안타까워하더니 그다음부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되자 계장은 무연고자로 처리하라며, 신입 공무원에게 이 사건을 넘겼다고 한다.


계장의 경험상 오래전에 이혼한 전처에게 전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려 봤자 좋은 얘기도 듣지 못하거니와, 아이가 너무 어리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여기서 사건을 종결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경험이 없는 신입 공무원이 어떻게라도 일을 마무리하고자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3주의 시간이 흘렀다고 계장은 그의 비극에 애도를 담은 점잖은 목소리로 그간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아이 아빠의 시신이 있다는 대학병원에 전화했다. 대학병원 측은 전화로는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으며, 시신을 확인하려면 아이와 함께 와야 하고(나는 이미 남이니까) 시신 양도는 만 13세가 넘어야 가능하며 시신을 양도해 가려면 3주간 안치실 이용료 천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전화받는 이의 차가운 목소리와 천만 원이라는 말이 뒤엉켜 더욱 가슴이 서늘해졌다. 시신 안치실이 호텔 스위트룸과 맞먹는 값이구나.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아이는 지금 열두 살이다. 대학병원이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거리이거니와 어떤 일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도 두려웠다. 사고 현장에 119와 경찰이 함께 왔다고 하니 사인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온몸에 열이 나는데도 춥다고 호소하며 품에 안겨 온다.

11월. 감기가 흔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춥다고 하니, 안치실에 있을 그가 자꾸 떠올랐다.

구청 직원과 상의 끝에 구청에 장례를 위임하기로 했다. 장례를 위임해도 장례에 참석할 수 있다고 구청 직원은 안내해 주었다.


“안 가면 평생 후회하며 살 수도 있어. 그렇게 마음 불편할 것 같으면 가 봐. 내가 같이 가 줄게.”


장례 전날 친구가 말했다.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다음 날 수내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인천에서, 나는 춘천에서 성남으로 가는 길목이다.

출발하는 순간부터 운전하는 내내 그와 함께 살던 10여 년 전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운전을 하려면 눈물은 참아야 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을 아프게 하기에 자살은 큰 죄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모두가 외면했던 그의 죽음을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람과 헤어지며 가장 죄책감을 느꼈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당시 시아버지는 병원에 누워 돌아가실 일만 남았는데, 내가 떠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에겐 가족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외면했던 것.





남편은 술을 마시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고를 쳤다. 친구를 만나러 나갔는데 새벽쯤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는 일이 1년에 한두 번씩은 있었다. 어린 시절 계모에게 가혹한 학대를 당했던 탓인가 하며 감싸 안아보려 했지만, 그의 사고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가 술을 마시러 나가는 날이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나는 긴장한 상태로 그를 기다려야 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지만, 아이가 태어나니 나의 불안은 더 커졌다.


아이가 9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또 새벽녘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그에게 두들겨 맞은 택시 기사에게 찾아가 빌며 합의했다. 물론 빌기만 한 건 당연히 아니다. 가지고 있던 적금을 깨어 합의금으로 주었다. 저마다의 사연이 다 다르겠지만 (도덕성은 논외로 하고) 누군가는 그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때 가족이라는 끈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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