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은 혼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성장하는 존재가 아닐까?
건강한 자기의 세계를 갖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통과 의례를 통과하고 무지에서 해방돼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삶의 불안이란 결국 ‘모름’에서 오는 것이다.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앎’이 중요하다고 선은 생각했다.
혼자 있어도 즐거운 사람, 혼자 있어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건강한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 가려면 자기와의 정직한 대면이 필수라고 생각했다(이 또한 자기를 알아가는 앎의 과정이 아닌가).
자기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 부족한(결핍된) 자기와의 끊임없는 대화(즉, 사유라는 과정을 거쳐 나를 인식하는 것, 바라보는 것, 그리고 나와 타자와의 관계도를 그려보는 것 말이다).
끊임없는 자기와의 대화란, (낯선) 세상에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유일한 생존방식이 아닐까.
사유의 시작은 건강한 삶의 출발이다.
적극적인 사고의 과정을 거쳐 불확실성을 걷어내는 것이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사유의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진화된) 인간은 덜 불안하고, 덜 우울하다.
선은 삶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의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독서는 생각을 활성화시키는 도구였다.
독서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생각의 차이’는 ‘삶의 차이’를 결정한다.
생각으로 채워지지 않는 삶은 자기의 존엄성조차 지키지 못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자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하는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각과 사유의 과정이 생략된 스펙 쌓기 교육을 받은 세대는 히스테릭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균형적 사고와 통찰력을 상실한 그들의 자의식 과잉은 개인의 불안을 증폭시키고(나르시시즘으로 발현된다),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한다(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로에서 헤매고 있다.
다수와(넓은 세상과) 소통을 포기한 그들은(소통을 포기한 그들은 인간애조차도 희박하다) 그들만의 카르텔 속에 안주하면서 세상과 벽을 쌓는다(또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이점 중의 하나는 명품을 지나치게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허상을 쫓는 대표적인 불안심리가 아닐까).
(선은 사유가 없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구토를 느꼈다. 오직 세속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왔던 그들은 돈에 대한 지나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물질적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생각했다.
사유가 없는 그들의 대화는 짧았고 깊이가 없었다. 그들은 명품을 착용하고 모임에 나와 잘 먹고 잘 사는 얘기를 나누다, 대부분 골프 얘기나 연예인의 사생활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은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시간이 쓰레기로 변한다는 공포를 느꼈다. 그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소중한 시간이 휴지처럼 구겨져 쓰레기 통으로 버려지는 낭패감.
사유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있는 듯한 절망의 시간이었다.)
선은 홈스쿨링 과정에 ‘건강한 자기의 세계’란 프로그램을 추가했다.
건강한 자기의 세계를 갖기 위해 우선 혼자만의 시간을 의미 있게 즐길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가 어릴 때부터 좋은 취미를 갖도록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독서와 음악을 가까이하고 전시회나 음악회에 자주 데리고 간 까닭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나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은 나무와 함께 백건우 연주회에 갔다.
그날, 백건우가 연주한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이었다.
연주자의 집중력에 관객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연주가 끝나고 피아니스트가 무대에서 퇴장하자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모두 돌아오고 싶지 않은 현실로 쫓겨난 기분이었다. 그동안 마음껏 누리고 있었던 거룩한 평화를 박탈당한 기분이었다.
그때, 뒷줄에 앉았던 40대 중반의 여자가 선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가 피아노를 쳐요?
“아니요……”
“몇 학년이에요?”
“5학년이에요.”
“대단해요! 어쩌면 아이가 그렇게 진지해요. 감상하는 모습이 어린애가 아닌 것 같아!”
여자의 말처럼 나무는 연주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연주자가 인도하는, 일상과는 또 다른 세계에서 그곳의 공기를 마음껏 흡입하고 있었다.
이런 정서적 풍요를 어디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선과 나무는 지방의 소도시에 있었던 탓에 외국의 유명 연주자들의 연주회에는 갈 기회가 적었지만 국내의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소도시를 방문할 때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갔다.
나무는 손열음의 연주에 압도된 표정이었고(손열음의 강한 포르테는 청중을 행복한 고통 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조 트리오가 부친인 성악가 조상현 선생님을 모시고 연주하는 귀향 연주회에서는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것 같았다. 팔순이 다 된 성악가가 앙코르 송으로 부르는 ‘못 잊어’는 어느 세계적인 가수의 노래보다 완벽했고 훌륭했다.
또 소도시의 일부 관객들은 때가 아닌 곳에서 힘차게 박수를 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첼리스트 조영창 씨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흘렀다(형식을 떠난 멋진 음악회였다).
선은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애들은 참 행복해! 이렇게 좋은 책들이 많으니까!”
선이 나무 세대에게 부러워하는 게 있다면 (딱 한 가지) ‘책’이었다.
선이 어릴 때에는 위인전과 세계 명작동화, 백과사전 등이 고작이었다. 종이의 질도 그림도 형편없었다.
그런데 선이 나무에게 읽어준 그림책들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웠다.
그림들도 훌륭했다.
나무에게 책을 읽어줄 때, 선의 뇌에서도 시냅스가 활발하게 연결되는 것 같은 율동이 느껴졌다.
독서는 인간이 다른 생명과는 (근본적인) 다름을 나타내는 중요한 암시인 것이다.
독서를 할 줄 아는 뇌는(인간은) 긴 줄거리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세상에 자기의 판타지를 실현하려는 용기와 확신을 갖는다(‘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암암리에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거기에 품격은 덤! 그것은 숨 쉴 때마다 드러나는 은은한 향기와 같아 과하게 명품 로고로 세팅한 멍청함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나무는 일주일에 두세 번,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말글터 문고에 갈 때마다 파티에 초대받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매일, 신간이 ‘쫙’ 깔리는 서점의 매대는 나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서점에 도착하면 나무는 먼저 어떤 책을 볼 것인지 매대를 훑어본 다음 그중에서 몇 권을 골라 자기만의 자리(지정석?)에 앉아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행복한 표정으로) 책을 읽곤 했다.
그런 나무에게 말글터 문고 사장님이 다가와 말했다.
“책 읽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서 봐도 괜찮아! 엄마가 없어도 언제든지 혼자 와서 봐도 되는 거야! 알았지!”
나무는 사장님을 보고 씩 웃었다.
가끔 선은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친절한 말 한마디가 때로는 한 아이의 인생에 아주 큰 ‘선물’이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