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쿨링이라고 하면 먼저 그럴듯한 계획부터 세우고 시작해야 될 것 같은데 선과 나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비장하지 않고, 즐겁게.
몇 가지 원칙은 있었지만 세부적인 학습 지도안 같은 것도 없었다.
몇 가지 원칙이라는 것도 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지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선은 우선 부모로서,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동안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을 많이 하고 살았는가.
어쩔 수없이 부끄러운 행동을 했을 때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살면서 부끄러운 행동을 안 하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선은 나무에게 말했다.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어. 노력해도 부끄러운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더라고.”
선은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인간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통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환경 만들기.
선은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모두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지나치게 엄격할 때, 아이들은 부모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거짓말로 도피할 생각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또, 아이가 능력 밖의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게 되었을 때, 거짓말을 발명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거짓말을 보고 자랐을 때―거짓말을 삶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보고 자랐을 때―이다. 이런 아이들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사는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는(착각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은 홈스쿨링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말했다.
처음 2~3년 동안은 좌충우돌하는 기간이었다고.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엄마는 딱히 할 일이 없다고.
왜?
홈스쿨링은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이지, 공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은 혼자 스스로 공부하는 법, 그걸 배우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자신감은 스스로 공부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자신을 믿고 서두르지 않게 자기만의 속도로 공부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지지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자신을 믿고 서두르지 않게 자기만의 속도로 공부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부모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부모의 상투적인 부정적인 말 한마디가 아이의 사고의 흐름을 막아 생각을 단절시키면 아이의 지적인 성장은 거기서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현상, 선이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알게 된 것은 ‘선’을 쫓는 사람의 두뇌는 진실에 도달하려는 의지로 뇌의 회로가 왕성하게 발달하지만 ‘선’을 외면하는 두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고 보이는 것을 왜곡하는 순간 사고의 분열이 발생한다. 정상적인 사고는 정지되고 깊이 있는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궤변을 늘어놓고 거짓말을 하는 뇌는 깊은 사고를 할 수 없다.
사고의 장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통찰은 두뇌의 완벽한 활성화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이에게 깊은 통찰이 있을 리 없다.
“무지는 악이다”라는 말이 있다.
선은 무지한 사람들을 두둔할 생각이 없다.
이 시대의 무지는 선에 대한 외면과 게으름, 진실에 대한 외면과 게으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무지―아비투스―를 받아들일 때, 아이의 두뇌성장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부모로부터 무지의 나쁜 습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이의 사고는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지는 더 이상의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세상의 눈치만 보고 세속의 부름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화되는 세상에서, 세속의 부름대로 살아간다면 (100세 시대에)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점점 ‘시대의 문화’에 소외되고 사고하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생각의 회로를 쭉쭉 뻗어나가게 하는 힘은 좋은 생각, 선에 대한 의지, 진실에 대한 의지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 순간 신의 의지가 내 삶에 관여하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사람의 뇌는 선량한 용도로 설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원래 우주의 메커니즘이란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선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매일 기도했다.
어느 날, ‘부모의 삶이 곧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갈림길에서 그 메시지를 생각하곤 했다.
아이는 부모의 삶에서 태도를 배운다.
태도는 아이의 삶을 결정한다.
머리가 좋다, 혹은 똑똑하다고 하는 것도 타고나는 것(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부모가 아이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환경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가 아이의 정서가 편안한 상태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을 때, 아이는 어떤 문제에 차분하게(편안하게) 접근하는 개방성과 근기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근기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했을 때, 성취감을 느끼고, 그 좋은 경험이 누적되어 그 아이의 탐구력이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긍정의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감으로 두뇌를 풀가동하는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부모의 역할 중의 하나는 지적인 세계에 출입증을 끊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아이의 정신적인 영역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이다.
삶의 뿌리는 의외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삶의 뿌리가 정신적인 영역에 닿지 않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흔들리게 마련이다.
현실의 조건에 따라 부유하는 삶은 쾌락이나 사치, 약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눈높이가 중요하다.
부모의 영향 속에 있는 성장기의 아이들은 부모의 눈높이 이상으로 성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시선이 현실적인 세계―물질적인 세계―에만 머물러 있다면 아이는 뇌가 발달하는 중요한 시기에 지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지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다.
엄마가 신호로 전달되는 정신적인 영역의 언어를 수신할 수 있다면, 정신적인 영역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동화를 들려주듯, 아이에게 느낌을 전달하고 정신적인 사유를 나누면서, 또 다른 세계―보이지 않는 가치의 세계 또는 지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 대한 상상력을 함께 나누는 ‘인생친구’가 되는 것이다.
엄마의 관심이 정신적인 가치의 세계까지 확대되어 있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놀이를 시작한다.
그곳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하고 그곳에서 존재의 싹이 튼다. 자아의 뿌리가 튼튼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삶은 즐거운 것이라는 희망도 정신적인 가치의 세계와 연결되어 끊임없이 인생을 탐구하는,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외로움을 경험하지만 외로움에 빠지지 않고, 우울을 경험하지만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뿌리에서 빨아들인 영양분으로 (우주의 갖가지 신호를 받아들여) 부지런히 갈 길을 개척하고 살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의 가장 중요한 환경이다.
그래서 내 아이가 똑똑한 아이가 되길 바란다면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