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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수 Jun 16. 2017

인기 많은 거지를 본 적이 있나요?

인사동 어느 예술인의 이야기

 그야말로 완벽한 거지꼴이었다.


 바닥에는 신문지와 먼지 묻은 담요가 깔려있었고, 옷차림은 두꺼운 헝겊 데기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머리는 일주일을 감지 않은 것처럼 기름기가 머리카락을 잔뜩 뭉치고 갈라놨다. 듬성듬성 보이는 흰머리와 허옇게 드러난 두피가 아저씨의 나이를 가늠하게 했다. 발에는 두꺼운 털양말이 신겨 있었지만 발에 맞지 않는 큰 사이즈였던지 반 이상이 발끝에서 헐렁하게 퍼져있었다. 내 코가 막히지만 않았다면 얼큰한 꼬랑내도 맡을 수 있을 듯했다.  

 인사동 길거리를 걸어가다 한 구석에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갔더니 이런 걸인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저씨는 붓 두 자루로 화선지에 한문을 쓰고 있었다. 과장된 몸짓으로 붓을 휘날리면 멋들어진 한자가 종이 위에 나타났다. 아저씨는 글자를 쓰면서 그 글자의 의미를 걸걸하게 설명했다.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근처 인사동 길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이 멈춰 서서 대체 저기서 무슨 싸움이라도 난 건가 하고 고개를 내놓을 정도였다.


 “‘받을 수(受)’자 밑에 마음이 있어! 마음을 주고받는 게 사랑이라는 거야. 러브! 으이? 크으 잘 썼다. 그래 이번엔 누가 가져갈 거요? 아지매? 옛다 사랑 많이 하소.”


 글자를 써서 사람들에게 파나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그냥 쉽게 주고 있었다. 화려한 말솜씨와 행위예술 같은 몸짓. 휘리릭 글자 써서 쉽게 돈 버려는 여느 상인의 술수인 줄로만 알았던 내 생각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아저씨는 이번엔 자기 바로 옆에서 쪼그려 앉아 글 쓰는 걸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여자애를 보고 내 너한테 하나 써주마고 ‘아름다울 미(美)’를 금세 그렸다. 그리고는 여자 아이 손바닥을 가져가더니 붓으로 먹칠을 하고 아름다울 미 글자 아래에 손도장을 찍었다. 그 가운데 마음 심(心) 하나를 작게 썼다.

 “마음이 이쁜 애가 되거라!”
 먹물이 잔뜩 묻은 손바닥으로 여자 아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아이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종이를 받아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저씨 저도 하나 써주세요!”
 “응? 자네는 도인인가? 목사님이야?”
 “아니요, 전 군인인데요.”

 “오 군인이라, 가만있자.”

 아저씨는 화선지에 충의(忠義)라는 글자를 썼다. 군인이면 모름지기 충과 의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믿음(信)이나 사랑(愛), 소망(望) 따위의 간지럽고 부들부들한 글자를 기대했던 내 바람과는 다르게 무겁고 굵직한 글자를 얻었다. 평소 군인 신분이라는 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로서는 충의라는 글자를 받았다는 것보다 그냥 글자를 받은 거 자체가 좋았다.

 처음에 거지로 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30분 만에 그 사람이 만들어낸 먹물 묻은 종이를 받고 좋아하게 되다니.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각자의 박자를 가지고 살며 혼자만의 시력만큼 살아간다.’
- 이병률, <내 옆에 있는 사람> 中 -


 아직 내 박자는 조급하고 시력은 낮기만 하다는 걸 다시 알았다. 그 아저씨의 박자와 시력이 궁금해졌지만, 궁금한 채로 두기로 했다. 다가가서 물어보기엔 아저씨는, 아니 그 예술가는 사람들에게 글자를 나눠주느라 충분히 바빴다.


이런 글씨를 받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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