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한번 크게 쉬고 나니

by 리시안


우리 아파트엔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필로티 구조라 비가 와도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날 좋은 날이면 어르신들은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고추도 말리고 삼삼오오 앉으셔서 야채도 다듬으신다. 도심 한 복판인데 이 공간은 흡사 시골 풍경 같을 때도 있다. 물론 나는 아무도 없을 때를 좋아한다. 어느 날 친절한 누군가가 벤치와 벤치 사이에 통나무 탁자를 갖다 놓았다. 주변을 어색하지 않게 제법 잘 어울린다. 여기는 바람길이라 특히 시원하다. 디건을 걸치고 앉아 있으니 딱이다. 나는 이곳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 좋다. 1층에 살아서인지 벽 뒤가 바로 우리 집이라는 느낌이 가깝게 느껴진다. 커피 한잔을 내려

들고 나와 마셔도 이상하지 않다.



한 달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드디어 어깨가 뭉치고 목이 잠겼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일이 기억나진 않지만 숨 한번 쉴 틈 없이 밀려 밀려서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전쯤 친정엄마가 편찮아지시면서 시작된 일상은 엄마에게 꽂혔고 꼬박 한 달이 되는 어제 엄마가 원하시는 재활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해야 할 일이 끝이 난 건 아니지만

어젯밤 아주 오랜만에 기절하듯 잠을 자고 평온한 주말 아침을 맞았다. 바람이 선선해서 깨어 보니 가을 날씨다. 어느새 9월이 훌쩍 넘어버렸다.



거실에 있던 킹벤자민이 자꾸만 잎을 뚝뚝 떨어뜨린다. 잘라낸 듯 떨어지는 잎들을 볼 때마다 같이 마음이 툭툭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나름 정성을 쏟는다고 생각했는 데 맘 쓰지 못한 한 달 사이 잎이 반이 되어 버렸다. 과습이 과다인지 영양이 부족인지 모르겠다. 고민을 하다 햇빛이 부족해서인가 싶어 베란다 쪽으로 옮겼다. 듣기로는 킹벤자민이 예민해서 자리 이동을 하는 것도 싫어한댔는 데 더 떨궈버리면 어쩌나 싶어 햇빛 아래로 살살 옮겨줬다. 그런데 진작 옮겨줄 걸 그랬나 싶을 만큼 햇빛 아래 킹 벤자민 잎이 싱그러워 보였다. 그리고 잎들 위로 비치는 가을 햇살이 아주 높게 느껴졌다.




장마와 태풍 같은 날들이 가고 어쩌다 가을이 왔다. 내 앞에 여러 가지의 일들이 쏟아져 올 때 우선순위로 세워지는 가장 큰 문제 앞에서 작은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다. 큰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야 풀어야 할, 다음의 문제들이 보인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크기의 문제들이 공격한다면 나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가장 큰 문제밖에 보이지 않는 나의 단순한 성격이 때로는 하나씩 풀어가게 하는 시간을 준다. 물론 나의 감정의 고삐는 단단히 잡고 가야 한다. 디테일한 감정들에 멈춰지면 내가 더욱 힘들어진다. 한 달간 나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까무러치게 몸이 힘들어도,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면 감정은 잠시 내려놔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는 차라리 생각을 멈춘다. 언젠가부터 나는 '왜'라는 생각은 안 하려고 한다. 굳이 필요하다면 '어차피'라는 말이 더 낫다.




아이들의 가을 옷들도 서서히 꺼내놔야겠다. 내일은 드디어 첫째 아이의 개강날이다. 맘이 쓰였던 여름을 보내고 맞는 가을 개강이 다행스럽다. 살면서 젤 무서운 것은 생각지 못한 변수인 데 무사히 개강을 하게 되어 기쁘다. 모든 일상이 물 흘러가듯 변화가 없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은 느낄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항상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 가면서 어른이 되어가겠지. 힘겹던 어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평온함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일도 모두가 별일 없는, 그저 평범한 하루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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