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근무지에서 만난 부장님이 오후마다 차를 권했다. 간단히 준비된 숙우와 찻잔에 연잎차, 보이차, 쑥차, 꽃차 등을 따라 주었다. 차를 마시자는 말에 처음에는 바빠 죽겠는데 무슨 차를 마신다고, 나보다 업무가 적어서 저러나 싶기도 했다. 매번 차 마시고 가라고 부르는 그 마음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바스락거리는 가벼운 찻잎 위로 적당히 데워진 물을 부으면 잎은 다시 살아나고 꽃은 다시 피어 나는 그 모습이 경이롭기 시작했다. 연둣빛, 보랏빛으로 우러난 찻물들이 한 모금씩 목으로 넘어오면 몸은 찻물을 따라 연두로, 보라로 물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해 가을, 인근에서 열린 차 박람회에 부장님 소개로 일행들이 함께 갔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갖가지 다구를 구경하는 재미며 직접 차를 재배하신 분들이 내려주는 차 시음까지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유난히 달았던 이슬차, 깨끗했던 쑥차, 그리고 표일배를 한 손 가득 들고 집으로 왔다. 표일배는 몇 년래 만난 가장 신기한 물건이었는데 그렇게 쏙 누르면 찻물만 나온다는 게 쉽고도 재미있었다. 그렇게 스며든 차 향기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후로 가장 큰 난제인 커피가 좋아, 차가 좋아 로 내 곁에 스며들어 있다.
오랜만에 차 박람회 소식에 책 친구와 함께 가게 되었다. 더 다양해진 차 시음과 작품에 가까운 다구들, 그리고 이게 차와 무슨 상관이지 싶은 물건들까지 금요일 오후의 박람회는 차 향기와 사람 향기로 북적였다. 그 사이 차를 즐기는 세대가 아주 젊어진 것과 중국분, 스리랑카 분들이 직접 운영하는 외국 차 부스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하동의 제다업체가 눈에 보이지 않아 서운했지만 마치 더치커피를 연상시키는 제주 냉침차의 세계를 맛본 것은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모금이었다. 아주 소량의 몇 방울이 코끝을 향긋하게 하더니 입 안을 비가 그친 여름 아침으로 만들어 버렸다. 차를 만드는 것에는 명인이지만 제품 판매에는 초보인 사장님들의 작품을 다 사주고 싶었지만 가벼운 찻잎이 우려내는 어마어마한 물의 양을 알기에 가볍게 한두 봉지 사서 돌아왔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들어 다시 뜨거움을 만나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 그게 차가 가지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부풀려 더 크게, 더 무겁게 보이는 일에 지칠 때, 차 한잔으로 몸을 따뜻하게, 생각을 가볍게 해 보는 건 어떨까? 어느새 나도 차를 권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나니 그 부장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 언젠가 차를 소개해준 나를 고마워하게 될걸?
진짜 그러고 있다. 그분에게서 시작한 차 향기가 오늘도 나를 물들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