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건강한 자존감의 핵심을 '무조건적 존중'에서 찾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너는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받으면서 성장한 사람은 조건 없는 자기 수용을 배웁니다.
반대로 "성적이 반에서 1등은 돼야 장난감 사줄 거야", "아빠가 하는 말 잘 들어서 정말 착해", "이번에 수학, 영어 시험에서 100점 받으면 과목당 용돈 10만 원 줄게"와 같은 조건부 사랑을 많이 받으면 '나는 성과를 낼 때만, 착할 때만, 도움이 될 때만 가치가 있다'라는 식의 조건부 자기 존중을 갖게 됩니다.
로저스는 우리가 삶에서 겪는 여러 불안과 우울, 자기혐오가 '있는 그대로의 나'와 '이래야만 가치 있다고 배운 나' 사이의 거리에서 온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진짜 회복은 '더 잘하는 나'가 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존중해 주는 태도를 되찾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외적인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나를 바로 보는 관점과 태도가 로저스가 말한 건강한 자존감의 핵심입니다.
성과가 없으니 자존감도 바닥이에요
한동안 저는 자존감의 정의를 '성과가 좋으면 자존감이 올라가고, 실패하면 자존감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더 잘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저는 항상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어서, 항상 더 잘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지금 내 상태가 부족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잘못된 도식(schema)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이어졌습니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성공시키면 다음 날까지는 기분이 상당히 날아갈 듯 기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반대로, 기간을 넘기거나 기대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한 날에는 퇴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이 유독 초라해 보였습니다.
결과에 따라서 기분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기분이 "나는 왜 맨날 이 모양일까. 나 같은 사람은 어디 가도 애매한 사람일 거야"라며 존재 자체를 성과의 점수표와 일치시키는 일은 지양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좋으면 자존감이 10점 상승하고, 실수하면 자존감은 20점이 하락하고,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으면 자존감은 50점이나 하락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내 자존감이 바닥이에요"라는 말을 자주 꺼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말의 진짜 뜻은 "요즘 성과가 없어서 나 자신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자기 평가 점수를 자존감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존감'과 '자존심'을 뒤섞어 쓰던 순간들
자존감과 관련된 책(자존감 수업, 자존감의 여섯 기둥, 하버드 자존감 수업 등)을 읽고, 저자의 강의도 들으면서 제일 먼저 부딪힌 부분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였습니다. 솔직히 한동안은 이 둘을 거의 같은 말로 쓰고 살았거든요.
누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으면 자존심이 상했고, 누가 나보다 잘하면 속으로 질투가 올라오면서 자기혐오에 빠져 자존감이 하락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둘의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자존심은 상대보다 내가 더 나아야 유지되는 감정이고, 자존감은 비교가 없어도 나는 소중하다고 믿는 감정이었습니다. 비교와 상관없이 존재를 인정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존감이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비교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저는 사회생활에서도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회의 시간에 제 아이디어가 별 반응 없이 넘어가고 이후에 비슷한 의견을 다른 동료가 말했을 때 팀장이 "좋은 생각인데?"라고 반응한 적이 있었죠. 그 순간 '자존심이 짓밟혔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히 그날의 일을 떠올려서 들여다보니 그건 자존심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내 말은 가볍게 지나가는데 다른 사람 말은 인정받는구나. 나는 이 팀에서 대체 어떤 사람이지?'라는 생각의 끝에는 '나는 역시 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존감의 결여가 숨어 있었습니다.
자존심은 '저 사람보다 내가 위냐, 아래냐'를 따지는 문제였다면, 자존감은 '내가 이 자리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을 꺼내며 노트에 정리해 봤습니다. 그날의 저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자존감이 흔들린 날이기도 했습니다. 상대 반응 하나에 스스로를 필요 없는 존재로 평가해 버리는 건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였습니다. 자존심은 남이 건드릴 수 있어도, 자존감은 결국 내가 나와 맺는 관계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조건부 사랑'을 내면화한 어른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인본주의 이론을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뜨끔했던 부분은 '조건부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는 조건부 자기 개념을 갖게 된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떠올려 보면 저는 어린 시절에 이런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번에 반장 되면 네가 그렇게 갖고 싶은 장난감 사줄게"
"이번에 시험 잘 보면 게임하게 해 줄게"
"더 잘해 임마"
"넌 뭐가 부족해서 공부 하나 못하냐"
이런 말들은 아버지가 저에게 했던 말들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나름의 응원이고 자신이 겪었던 환경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해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함이 몰려와 내뱉은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 입장에서는 메시지가 다르게 들어옵니다. 성적이 좋아야 사랑받고, 못하면 미움을 받는 존재. 그렇게 쌓인 말들은 어느새 '나는 유능해야만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더 강해집니다. 실수하면 스스로 '인간쓰레기' 취급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강했는지, 회사에서 제가 개발한 내용에 오류가 큰 문제로 번졌을 때 머릿속은 순식간에 '자기혐오'가 펼쳐졌습니다.
'에휴.. 이런 거 하나 잘 파악하지 못하다니..'
'나는 진짜 어디 가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이번 생은 진짜 망했네'
그때의 저는 실수와 '나'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못했습니다. 인지 오류가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의 실수만 해도 그동안 잘했던 모든 성공은 무시하고, 완벽해야만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조건부 사랑'의 노예가 되어 있었죠.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말대로라면 저는 어린 시절부터 내재한 '조건부 사랑'을 그대로 제 안으로 옮겨와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나라도 실수하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강박은 새로운 도전을 꺼리고, 새로운 관계를 피하게 됩니다.
자존감은 '내가 나를 대하는 말투'에서 시작합니다. 내면의 부모가 되어, 나에게 가장 친절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자존감의 기둥이죠. 그런데 곰곰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제 안에는 늘 표정이 굳어 있고 팔짱을 낀 채 비난을 쏟아내는 자아가 있었습니다.
'어휴.. 이런 정도로 힘들어하는 건 약한 거야'
'이 정도 성과로는 너무 부족해'
'다른 사람들은 다 잘만 하는데 넌 왜 그러냐?'
이렇게 오래도록 지내다가 자기 긍정이 바로 타인 긍정으로 갈 수 있다는 <내면 소통> 책의 내용은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항상 남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기 바빴던 사람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다치지 않으려고 한 방어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에 자기혐오가 가득한 자아를 완전히 쫓아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옆자리에 다른 자아를 하나 더 얹힐 수는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습관 하나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실수가 발생한 상황에서 먼저 자동으로 떠오르는 말은 늘 '아.. 나는 진짜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네'였습니다. 그럴 때 일부러 한 박자 늦게 다른 문장을 하나 더 붙여 보았습니다.
'그럴 수 있어. 물론 결과는 이렇게 되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어.'
친절한 말 한 줄을 덧붙인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순간 제 안에서 한쪽 목소리만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는 있었습니다.
'결과 - 인정 - 자존감' 순서가 아니라 '자존감 - 행동 - 결과'
한 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계속 성과가 좋지 않고, 평가도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성과가 나와야 자존감도 올라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심리학 강의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과가 나오고 인정받아야 자존감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자존감이 있어야 행동으로 나타나고 결과가 뒤따라 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순서가 뒤집혔다는 이 말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자존감이 먼저라니. 잘 되는 일이 있어야 자신을 믿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실제 저의 행동을 돌아보면 이 말의 의미가 조금씩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때는 도전할 마음도 줄어들고, 새로운 일을 맡아도 이미 안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시작합니다. 반대로 비록 실수해도 충분해 해낼 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날에는 일단 시도해 보는 행동이 나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행동의 크기와 방향을 바꾸고, 그 행동이 다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결국 자존감은 결과의 보상이 아니라, 결과로 나아가기 위한 기초 체력에 가깝습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충실했던 자신을 감싸주는 한 마디 말이 자기 긍정에 영향을 주고, 그 말을 반복할수록 조금씩 다음 행동으로 넘어갈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항상 밝을까요? 예전의 저는 자존감이 높으면 항상 당당하고, 어디서든 의욕이 충만하고, 우울해 보이는 날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치고 무기력한 날이면 '역시 나는 자존감이 낮아'라고 스스로를 더 깎아내렸습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높은 사람도 불안하고, 슬프고, 무너지는 날이 있지만, 그 감정을 자기 존재 전체와 연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는 실패한 하루를 보냈다'와 '나는 실패한 인간이다'라는 말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이며, '지금 많이 불안하다'와 '나는 늘 불안정한 사람이다'라는 문장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힘든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진 나도 여전히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함께 앉아 위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고 수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지치고 울컥하는 날에도 '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해줄 여지가 조금 생겼습니다.
자존감 회복은 대단한 변화가 아니라 사소한 문장에서 시작한다
자존감에 관련된 책을 읽고 가장 크게 바꾸려고 했던 건 거창한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역시. 사회에서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군'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면 지금은 '아쉽다. 하지만 이 경험은 여기서 밖에 못하는 경험이라서 나중에 꼭 쓸모가 있을거야'처럼 나를 위한 다정한 말 한마디를 자주 해주려고 합니다.
칼 로저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결국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누군가'를 평생 찾아다니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역할을 가장 꾸준히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심리 독서 모임인 '이상한 마음 서재'를 운영하면서 양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쓰다듬어주는 행동으로 마무리한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을 칭찬해 주며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주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칭찬보다 비난일색이었던 자신에게 연민을 보내는 행동에서 우리는 회복이라는 감동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칼 로저스의 이론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뛰어난 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인 나에게도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먼저일지도 모릅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아주 짧은 약속 하나. 그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가 늘 찾던 그 '건강한 자존감'은 어딘가 멀리서 한꺼번에 찾아오지 않고 매일의 사소한 위로 사이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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