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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세젤이맘 Sep 11. 2021

오늘도 옷을 뒤집어 입었다.




오늘도 옷을 뒤집어 입었다. 하얀색 라벨이 오늘도 어이없게 팔랑거린다. 

속옷을 뒤집어 입고 티를 뒤집어 입는다. 가끔 앞뒤가 바뀌어 티가 턱밑까지 올라오기도 한다. 

신랑은 처음 몇 번은 귀여운 듯, 가여운 듯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얘기해주더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보고도 얘기도 안 한다. 


둘째를 낳고 흰머리 올라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고 깜빡깜빡 건망증 사례도 늘었다. 평소 잘 알고 있던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매표소 직원에게 그거, 음악 나오는, 보... 퀸 나오는..이라고, 무슨 초성게임도 아니고 주어 목적어 다 빼놓고 조사와 형용사만으로 개떡같이 설명을 한다. 아~ 보헤미안 랩소디요? 찰떡같이 알아 들어주는 직원 앞에서 민망함에 돌아서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 


'아... 쪽팔려... 벌써부터 왜 이러니....'


연예인 이름이나 물건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연예인 이름은 종종 성을 바꾸거나 내 맘대로 작명을 해버리기도 한다. 


'언니, 이제훈 나오는 드라마 재밌더라 그거 봤어?'

'이제훈이 드라마를 찍었어?'

'많이 찍었지 tvn에서 하는 건데 재밌어 스릴러야 언니 좋아할 것 같아'

'그래? 이제훈이 드라마를 많이 찍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언니,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야? '


동명이인의 다른 연예인을 두고 상대방과 계속 대화를 이어나간다. 

나보다 8살 어린 그 친구에게 이제훈은 드라마 시그널에서 김혜수와 주연으로 활약했던 키 크고 훤칠한 배우다. 마흔인 나에게 이재훈은 당연히 쿨(COOL)의 메인 보컬, 중고생 시절 수많은 히트곡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줬던 그 이재훈이다. 어떻게 이재훈이 그 이제훈이 될 수가 있지? 


약국이나 마트에 가서도 사고자 하는 물건 이름이 생각이 안 나 생각나는 글자만이라도 간신히 얘기한다. 


'아 그거 있잖아요 무슨 초...인데... 아이들 배 아플 때 많이 먹는 약이요..'

'아 백초 시럽이요?'


사고자 하는 약의 효능을 설명하거나 그 물건의 쓰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며 찰떡같이 알아주길 바라는 일이 수도 없다. 


노화인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기억력 감퇴가 있다고 하더니, 앞치마를 보관하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외출하려 나설 때마다 8살 큰애는 단도리를 한다. 

'엄마, 핸드폰 챙겼어? 차키는? 다시 한번 봐봐'

바리바리 짐을 챙겨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번거로움을 몇 번 경험하더니 알아서 챙기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어렸을 적 친정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순식간에 확 늙어버린 것 같아 서글퍼지기도 한다. 


내 나이 마흔둘, 직장생활 12년 차, 육아 8년 차다. 어설픈 나이는 지났다. 능숙해지는 나이, 무르익어 가장 뜨거울 수 있는 나이다. 헤매거나 당황할 일도 거의 없었졌는데 예기치 않은 노화 증상이 빠르게 찾아왔다. 


나 아직 젊은데.. 아직 아줌마 소리도 많이 듣지 못했는데...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얘기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100세 시대에 40세면 아주 한참 때 아닌가. 분명 윗세대와 우리는 다르다. 시대가 변했고 그에 따른 생활방식도 변하면서 확실이 우리는 조금 세련되졌다. 많이 배우고 경험하면서 무작정 나 자신을 가족이라는 굴레 속에 희생시키지 않고 아낄 줄 알고 꾸밀 줄도 알게 됐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나이가 젊어진 속도를 신체 나이는 아직 따라가지 못했나 보다. 어릴 적 아빠가 흰머리를 뽑아달라며 누워계시던 때가 내가 중학생이었으니 그때 아빠도 40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내가 옷을 뒤집어 입는 것은 단순히 건망증이라는 노화의 영향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옷을 뒤집어 입는 것과 동시에 뭘 자꾸 흘리고 놓친다. 음료를 따르다 흘리고 냄비 뚜껑을 떨어뜨린다. 설거지를 하다 그릇을 놓치기도 일쑤... 나는 항상 분주했다. 


한 번은 출근한 나에게 남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뭐가 그리 급해서 가스불도 끄지 않고 갔냐고...  어? 아닌데.. 나는 분명 어제 먹다 남은 꽃게탕을 데우기 위해 가스불을 켰고, 큰애 식판에 국을 담기 전 분명히 가스불을 껐었다. 그런데 냄비까지 다 탔다고 했다. 아... 어떻게 된 거지? 가스레인지 손잡이를 끝까지 제대로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나는 가스불을 끄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면서 다음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끝까지 돌리지도 않은 채 다음 일을 해치우기 위해 손과 발을 옮겼을 것이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항상 바빴고 서둘렀다. 워킹맘은 절대적 시간 빈곤자라는 말이 절대 틀리지 않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타임별로 해야 할 일을 정해놓고 시간 내 해결하려고 애썼다. 머릿속에는 그날 할 일이 차례대로 세팅이 돼 있고 모든 일을 하나둘씩 쳐내면서 하루 일과를 소화했다. 


그 무렵 '돈의 속성' 김승호 작가님의 책을 읽다 머리가 확 열리는 번뜩이는 내용을 만났다. 

김승호 작가님이 돈을 버는 이유, 그는 '돈을 벌어 시간을 산다'라고 했다. 

와... 시간을 산다고?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아등바등 아이들을 키우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지 삶의 목표가 확실해지는 기분이었다. 시간을 살 수 있다니 달콤했고 꿈만 같았다. 우주에서 혜성 충돌이 일어나 온 지구를 비출 정도의 강렬한 섬광이 나에게 집중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시간' 아닌가? 책 읽을 시간, 글 쓸 시간, 운동할 시간, 커피 마실 시간, 카페에 갈 시간, 여행 갈 시간 등등. 하기 싫은 일들을 돈이 대신해준다면 그만큼 시간이 생길 것이다. 진짜 시간이라는 것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너도 나도 '경제적 자유'를 외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나에게 절실함이었고 결핍이었고 욕망이었다. 


결혼 전, 퇴근 후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저녁 메뉴를 고르고 할 일 없이 혼자 쇼핑을 다니며 핸드폰 연락처만 뒤적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흥청망청 먹고 놀자 대학생 시절에 잡히지 않았던 것들이, 왜 이제야 눈에 보이고 잡고 싶어 안달이 난 걸까?


마흔이 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떠밀리듯 만들어낸 것 말고, 제대로, 주체적으로 인생을 한번 설계해 보고 싶었다. 이대로 오십 대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꿈이라는 것을 한번 쫓아보고자 삶의 방향을 틀어봤지만 이래저래 항상 걸리는 것은 좀처럼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하루 24시간 안에, 해야만 하는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배분해야 했다. 엄마이자 직장인인 나는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틈새 시간을 이용하거나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제는 옷을 뒤집어 입고도 태연한 나를, 신랑은 애처롭게 바라보며 얘기한다. 


'뭐가 그리 급해서 그래.... '


시간이 왜 이리 아까운지 모르겠다. 

어릴 적 그렇게 느리게 가던 시간이란 놈은 언제부턴가 저만치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빨리 가는 정도가 아니다. 

제발 멈추어다오~~ 붙잡고 늘어지고 싶지만 지금 내게 시간은 빛의 속도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어른의 시간은 왜 짧은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이유는 '기억'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면서 신기한 것도 많고 그만큼 설레는 순간도 많다. 생생하고 강렬한 기억은 길고 자세하게 마음에 새겨지고 그에 따른 의식된 시간도 길고 빼곡하게 채워진다는 것이다. 반면, 차츰 반복되는 날들이 늘어나고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은 실제로 존재한 시간만큼 기억 속에는 남지 않게 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설레는 일도 없어지고 새로운 일은 더더욱 없어지지만 뻔하고 식상한 날날 은 더 많아진다. 기억 속에 저장되는 순간들이 없어지니 체감하는 시간이 매우 짧고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장 마리 귀요- )


지금 나의 기억공간에는 얼마나 생생하고 강렬한 기억들이 빼곡하게 쌓여있을까


나의 시간들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빨래를 한다. 저녁을 먹이고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양치를 시킨다. 쳇바퀴 같은 뻔한 일상들은 내 기억 속에서 심하게 스킵되고 있었다. 스킵.. 스킵.. 스킵... 


무엇을 위해 이리도 분주할까, 무엇을 위해 이리도 허둥지둥 일까

옷을 뒤집어 입고, 그릇을 깨고, 가스불을 끄지 않아 냄비를 태워가면서 나는 무엇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고 할 때마다 무언가 손끝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결핍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욕망으로 들끓고 있던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들을 하염없이 놓치고 있었다. 항상 앞으로 다가올 미래만, 내일만 준비하며 정작 가장 중요한 지금, 현재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뻔하고 식상한, 숙제처럼 해치워야 하는 일상들을 쳐내느라 얼마나 많은 '순간'을 잃어버렸을까


박웅현 님의 '책은 도끼다'에는 '개처럼 살자'는 말이 나온다. 

개는 밥 먹을 때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잘 때 내일의 꼬리 치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개야말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고,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있다. 


어떤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어떤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어제의 일을 후회하고 내일의 일을 걱정하며 개만도 못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나의 '현재'를 덧없이 흘려보내며 옷을 뒤집어 입고 그릇을 깼다. 아이들과 남편을 채근 대며 해야만 하는 일들을 쳐내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애타게 갈구했다. 

그러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애타게 찾았던 그것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나는 얼마나 극적이고 강렬한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나 들어도 감탄할 만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내세울 만한 것이어야 한다면 그 보다 훨씬 많은 시간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방의 무엇을 기대하며 과도하게 몸부림을 치다 결국 내 몸에 상처를 남길지도 모른다.  


진짜 행복은 완벽한 삶이나 최고의 성공이 아니라 '충분히 좋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인가 - 김혜령 - )

하루하루 지금 이 순간을 나만의 모양으로 그리고 색깔까지 입혀서 아름답게 만들어보는 것, 다른 그 누구에게 말고 나에게 충분히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 본다면 나의 하루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킵하지 말아야 한다. 인상깊었던 영화의 한 장면,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감탄하는 것처럼 지금 내 순간을 일시정지 상태로 만들어서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 멈추고, 오랫동안 바라보면 그때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희미하게 사라져 가던 시간들이 강렬하고 또렷하게 기억속에 저장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나의 일상, 루틴들을 새로운 눈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가장, 최고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좋음으로 누릴 수 있는 삶을 만들어 보자. 


그대의 온 행복을 순간 속에서 찾아라
하루에 매 순간 그대는 신을 송두리째 가질 수 있음을 잊지 말라

- 앙드레 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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