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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라킴 Apr 13. 2021

제발 내게 딱 붙어있어줘

임신 12주 차가 되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벌써 3개월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몸의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나름 즐겁게 극복하고 있었고. 간간히 비피침이 있었으나, 소량이었고 산부인과에서 초기에 아기가 착상하는 과정에서 그럴 수 있다고 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12주 차엔 기형아 검사를 했다. 처음으로 남편과 같이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젤리곰이었던 아기가 3등신이 되었고, 콧대가 보일 정도로 얼굴의 형태도 갖췄다. 목 투명대도 정상 범위여서 추가 검사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기는 배 안에서 연신 꼼지락거렸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처음으로 직접 아이를 본 남편의 얼굴은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운전을 하면서도 오늘 본 아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까 움직이는 걸 보니 아기가 장난꾸러기일 거 같다며 웃었다. 행복했다. 남편이랑 같이 병원에 오는 게 이래서 좋구나...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뭐가 줄줄 샜다. 미끄덩하게 아래로 빠져나가는 느낌. 처음 느껴보았지만 몹시 불쾌했다.


"오빠.... 나 얼른 화장실 가야 할 거 같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재빨리 속옷을 확인했다.


새빨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속옷을 가득 적시고 다리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걸 보고 기절할 것만 같았다. 옷을 추스를 새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소리를 질렀다. 남편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어떡하지. 오빠 나 어떡해. 아까 잘 있는 거 확인했는데. 이게 뭐지. 나 어떡해."


"진정해, 다시 병원 가자. 정신 차려. 얼른 옷 입어"


남편이 새 속옷과 생리대를 가져다주었고 우린 급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진정할 수가 없었다. 병원 접수대에서도 눈물이 자꾸 나서, 남편이 대신 상황을 설명해야만 했다.


아까 분명히 잘 있었는데!! 분명히 내가 확인했는데!!!


대기를 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까 봤던 움직이고 있던 아이의 모습을 자꾸 상기하는 것뿐이었다.


병원에 가보니, 원인은 모르지만 자궁수축이 일어나 자궁 근처의 혈관이 터진 것 같다고 했다. 급하게 지혈을 하고, 다시 초음파로 아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출혈이 있었지만 다행히 아기에게 영향은 없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을 거라며 다독여 주셨다.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더 왈칵 솟아서 처음으로 의사 앞에서 오열했다. 무엇보다 출혈이 멈추는 게 중요하니, 당분간은 누워서 생활하라고 하셨다.


갑자기 모든 게 순조롭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됐지? 아무런 신호도 없었는데? 그동안 아기가 혼자 너무 잘 자라줘서 내가 아기를 너무 당연시했던 게 아닐까? 내가 너무 마음 놓고 있던 게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안전한 건 확인했지만 놀란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아서 자꾸 눈물이 났다.


출혈은 3-4일간 지속됐다. 양은 줄었지만 계속 나오니 불안했고. 화장실을  때마다 아래로 피가 쏟아지는 상상을 하며 마음을 졸이곤 했다. 남편은 고인 피가 당분간 나올  있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기에게   좋으니   의연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 더 이상 울고만 있을 수 없어. 아기가 더 꼭 붙어있을 수 있게 내가 잘해야 한다!


누워서만 있는 생활은 불편하기만 했다(평소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는 걸 상상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마음대로 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게 고역이었다. 자세도 휙휙 바꿀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없었다. 밥을 먹고 나서가 제일 불편했는데, 원래도 소화가 잘 안되는데 누워있기까지 하니 항상 속이 더부룩했고 입맛도 없었다.


누워서 하늘만 보고 있을  없어서 티비 특히 넷플릭스를 많이 봤다(대학원생이니 책이나 논문을 보면 좋았을 테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없었다는 변명을 해본다). 아기와 관련된 내용만 봐도 심각해져서 시트콤만 계속 틀었다. 누가 보면 팔자 좋다고 하겠지만, 눕고 싶어서 눕는 것과 누워야만 해서 눕는 것은 다른 일이다. 계속 즐거운 장면을 보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매일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의외로 위로가 됐던 게 있는데, 그건 네이버 카페였다. 나는 주위에 아이가 있는 친구들이 굉장히 드물었고, 사회생활도 연구원이나 대학원에서 하다 보니 지인들 대부분이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누구에게 하소연하기가 참 어려웠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원래 다 이러는 건지도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익명의 공간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글을 읽고 버틸 수 있었다. 처음 엄마가 되어 생기는 이런저런 고민들에 쏟아지는 격려와 위로 그리고 여러 가지 팁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 이후로 16주가 되기 전까지 출혈이 있다 없다를 반복했다. 피의 양은 줄어들었지만, 언제쯤 이게 끝날지 애가 탔다. 이러다 남은 기간은 쭉 누워있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워있는 것뿐이었다. 남편을 통해 소식을 들었던 친정 엄마는 나 혼자 밥을 제대로 못 먹을까 걱정이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반찬을 해다 나르고 점심밥을 차려주셨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기가   동안 무사히 지내는  얼마나  축복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또한 임신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변수 가득한 기간이라는 것도. 내가 어찌할  없는 자연의 섭리란 이런 것이구나.


아기야, 제발 내게 딱 붙어있어 줘!! 


시간이 날 때마다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의 임신 4개월 차는 이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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