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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인철 Oct 26. 2022

갑툭튀 26살 청년, 국회의원 후보 되다.

30대 활동가의 대중 파워 형성기



'제가 청년당 후보로 출마해보겠습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넓은 좌식 공간에 30여 명의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약간 정적이 흘렀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갑툭튀였다.


2012년, 나는 청년당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를 하였다. 당시 만 26세였던 나는 전국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나는 그 이전에 정치와 관련된 활동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전공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분자생물학이었고 학생회 활동이나 관련 활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정치 쪽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던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정치를 제대로 해보겠어! 한국 정치가 바뀔 수 있도록!'과 같은 굳은 각오는 사실 없었다. 청년당 창당 프로젝트에 나름대로 몰입을 해서 참여했고 '기왕 청년당도 만들었겠다, 적극적으로 해보지 뭐' 정도가 나의 포지션이었다.


당시 청년당의 후보는 사실 당선이 목적이라기보다는 국회의원 선거라는 국면에서 청년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성격이 더 강한 편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2가지 다른 선택의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문화콘텐츠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단체에 다니는 길이 있었다. 기회가 되면 적어보겠지만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1년간 휴학을 하면서 나는 인문학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때 했던 공부가 너무 재미있게 느껴져서 나는 아예 진로를 바꿀 생각을 해버린 케이스였다. 


나는 학부 전공을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4학년 2학기 때 학원강사를 하며 졸업 후 1년을 보낼 생활비를 모으고 있었다. 대략 500만 원 정도를 모았었는데 이 돈은 고스란히 출마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비용의 일부로, 국고로.. 날아가(?) 버렸다. 참고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라에 1500만 원을 반드시 내야 자격이 생긴다. 돈이 없는 시민은 출마를 할 수 없는, 출마하고자 하는 시민은 돈이 있어야만 하는 불합리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한 번의 선택은 이후 내가 이른바  '비영리 영역'에서 쭈욱 일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나는 지난 10년 간 지자체 산하기관, 정당, 시민단체, 연구소 등 나의 본래 전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른바 사회운동적 성격을 지닌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청년당 후보로서 갑툭튀였던 이유는 아무도 나의 출마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활동가도 아니었고 그룹의 주요 멤버도 아니었다. 대학생이 대외활동에 참여하는 정도로 함께 하던 나는 청년당 창당 과정을 함께하다가 이제 출마할 사람이 필요하니 누구라도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자는 제안에 덜컥 손을 들어버렸던 것이다. 당시 '이 시대의 청년들' , '새로운 희망'과 같은 단어들이 섞인 제안을 들으며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


출마의 가장 큰 장벽은 출마자격을 얻기 위한 1500만 원의 기탁금이었는데, 당시에 나는 '1500만 원이야 취업해서 금방 갚으면 되지, 얼마 걸리지도 않겠네'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기탁금 1500만 원을 지인들에게 빌렸고 이후 이를 갚는데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회사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고 집 근처 김밥천국에서 돈가스 대신 참치김밥을 사 먹으며 돈을 아꼈다. 지하철 한 달 정기권을 끊으면 낸 돈보다 10회 이상 지하철을 많이 탈 수 있도록 충전이 되는데 대신 마을버스와 연동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마다 마을버스를 타는 대신 가쁜 걸음과 호흡으로 합정역 6번 출구를 향해 걸었다녔다. 아니 뛰어다녔다.


2012년의 ' 어렸던 나'는 그렇게 겁도 없이 갑툭튀 출마했고 이후 이어지는 활동에 발을 '깊이' 디뎌버렸다.  '깊이'라는 건 활동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어버렸다고 해야 되나? 그냥 옆에서 하하호호 즐기며 가볍게 활동할 수 있는 기회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고 나는 어느샌가 활동에 '올인'하고 있었다.


청년당은 당시 법에 의해 4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강제 해산되었지만 이 당시 나의 선택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내며 10년의 활동으로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사람들이 'NGO' 혹은 '비영리 단체'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여러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비영리 단체'에 대한 정의는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비영리 단체(非營利團體, 영어: non-profit organization, NPO)는 소유주나 주주를 위해서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대신에 그 자본으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는 단체를 말한다. [1] 비영리조직(非營利組織), 비영리기관(非營利機關)이라고도 불린다. 흔한 예로 자선단체(慈善團體 , charitable organizations), 노조(勞組, trade unions), 그리고 공공 예술 전시를 위한 조직이다.  - 위키백과 - 


사전의 표현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렵다. 비영리 단체도 더 다양한 구분이 있겠지만 내가 활동해왔던 영역을 쉽게 표현해 본다면 '우리 사회 공동체를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공익 활동을 하는 곳' 정도일까? 


한반도 평화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평화재단, 청년문제를 다루는 서울시 청년허브, 깨끗하고 젊은 정치를 꿈꾸는 우리미래, 사회적 약자들의 전략을 정리해내는 다윗프로젝트 등 누군가 듣기엔 다소 거창해 보이는 일들을 사람들과 함께한 지 11년이 되었다. 그렇게 28살의 젊은이는 11년 활동을 지나 38살이 되었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정말 순식간에 11년이 흘렀고 나는 활동을 하며 내 주위 친구들보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 11년 간 내 삶의 1순위는 활동이었고 퇴근을 한 후에도, 주말에도 나의 일정표는 활동으로 가득 찬 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지난 11년을 정리해보고자 인생의 1막을 정리하는 느낌으로 글을 써보려니 지금 이 순간에도 감회가 새롭다. 


올해 6월까지 실행한 전략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는 내 인생의 1막이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2막을 다시 열기에 앞서 내가 해왔던 일들을 한 번쯤 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변화를 만들기 위한 대중파워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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