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8년생이다. 70년대 끝물에 태어나니 나름 굵직한 세상의 변화를 몸소 겪을 일이 참 많았다.
다 커보고서야 어렴풋이 알았다.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한 집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유 있는 축으로 평범하게 누릴 것 다 누린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평범하다는 것의 평균치를 가늠한다는 것은 당시의 나로선 불가능했다. 내가 속한 좁디좁은 세상은 꽤 오랫동안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나를 순진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은 지금처럼 저출산을 우려할 필요가 없고, 여전히 공공연하게 남아를 선호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나는 소위 딸만 넷인 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 낳으려다 줄줄이 딸 사탕이 된 거라 했다. 그래서 사람들 흔히 하는 말처럼 가장 고운 셋째 딸이었다고도 말 못하겠다. 늘 볼이 발갛고 눈물 자국 달고 사는 움츠리며 자란 나였으니까.
엄마 등에 업혀 우유병을 받아쥐고 먹는 걸 좋아하던 시기에 나는 친엄마를 잃었다. 영문 모를 이별이었고 설명해준다 한들 이해할 능력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늦게서야 엄마아빠가 이혼을 했다는 걸 알았다.
어느 날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엄마 대신 몇 달 지나 새엄마가 왔다는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엄마는 날 늘 긴장케 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엄마는, 마흔다섯해나 넘긴 나를 수도관 터진 듯 종종 울게 만든다.
초등학교 1학년의 하굣길이었다. 발목에 무게추를 하나씩 늘여 다는 것처럼, 집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무겁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단독주택인 집 대문을 들어서면 바짝 긴장하고 마음을 다졌다. 오늘은 엄마 기분이 괜찮아야 할 텐데...
하교하고 오면 늘 당연하게 자기 양말과 속옷을 빨았다. 언니들은 가끔 걸러 혼이 났지만 나는 거르지 않고 엄마의 규칙을 따랐다. 집 안 화장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세숫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담았다. 누런 빨랫비누를 때 탄 부분에 문지르고 작은 내 손등을 빨래판 삼아 문질렀다.
그날은 엄마가 기분이 좋지 않았나 보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느새 문간에 선 엄마가 잔뜩 날 선 말을 머리 뒤편으로 내다 꽂았다.
“빨랫비누 비린내 진동하니까 가지고 나가서 수돗가 가서 빨아!”
‘다른 날은 여기서 빨았는데... 바깥은 너무 추운데...’
속으로 의아했지만 엄마 표정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마당 한 구석의 수돗가, 널찍한 빨강 고무대야 안에 살얼음 낀 물이 반쯤 담겨있다. 한낮인데도 2층으로 오르는 계단 하부의 수돗가는 그늘져 겨울바람이 쌩하니 휘돌아 불었다.
울음이 날 것 같았다. 그곳은 나 혼자였고, 수돗가는 휑했고, 물은 너무 차고 손이 시렸다. 비누조차 얼어붙어 빨래에 묻지 않았다. 맨손에 닿는 빨랫감은 거칠어 손등을 할퀴었다.
벌게진 손등보다도 얼어붙는 손가락 끝이 더 아팠다. 살얼음 밑 물을 바가지로 퍼내면서 계속 생각했다. 내가 왜 이 날씨에 마당 수돗가에서 이걸 빨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엄만 오늘 유난히 빨랫비누 비린내가 심했던 걸까.
그날 울지 못했던 마음이 꾹 눌린 채 남아있다. 낡지도 바래지도 않은 영상처럼 끝도 없이 자동 재생된다.
그날, 커다랬던 빨강 고무대야와 시리도록 광채나던 은색 수도꼭지, 한눈에도 아파 보이는 빨간 손등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했던 아이, 빨래를 헹구며 차마 울지도 못했던 그 아이가 마음 아프다.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도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었다는 것을.
내가 단지 첫 번째로 귀가했단 죄로 그 날것 같은 엄마의 감정을 받아냈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그 낮의 일을 다른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여느 아이처럼 아빠에게 이르지도 못했다.
보살핌받을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그날, 혼자라는 게 뭔지 알았고 외로움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내 등을 때려서라도 울리고 싶다. 울음을 다 그치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집안으로 들어가야 했었더라도 나는 엉엉 울고 갔어야 했다.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다.
오랜 세월동안 스스로를 배신하고 계속해서 부모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살았던 자신을 깨닫는 것은
심리치료의 아주 중요한 발걸음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굴욕감을 주거나 무시하고 때리거나 심지어 성적 학대를 가해도 사랑을 갈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