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바뀌지 않는다.
엄마의 전화가 걸려 오는 날은 온 마음이 흐트러지는 날이었다.
물에 가라앉아있던 진흙들을 마구마구 휘저으면 누렇게 진흙탕이 된 채 한동안은 맑아지지 않는 것처럼, 엄마의 전화는 몇 날 며칠 내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재생 오디오 같은 엄마의 하소연과 아빠에 대한 험담, 넋두리들이 전화를 받는 순간 곧바로 펼쳐질 것이 너무나도 뻔해서, 핸드폰을 뒤집어엎고 보이지 않게 두고 싶었다. 하지만 받지 않으면 끊임없이 전화해 댈 엄마 성격을 알기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맞을 매 빨리 맞고 해치우자, 벗어나자, 이런 마음으로 틈이 나면 바로 회신 전화를 걸어 ‘들어야 할 것’들을 들었다.
엄마는 내가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부턴 무슨 생각이었는지 부쩍 전화를 많이 했다. 퇴근하면 보게 될 얼굴인데도, 화장실 갈 틈 없이 바빴던 내 직장 업무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한 번 걸어 못 받으면 바쁜가 보다 하고 기다릴 법한데도 엄마는 자기 마음이 가장 바쁜지라 그런 배려 따위 없었다. 연속으로 서너 통씩 부재중 목록에 남겨놓곤 했다.
잠시 한숨 돌리는 틈이 생겨 부재중 목록에 찍힌 ‘엄마’라는 글자와 그 옆 괄호 안의 call 수를 확인할 때마다 심장이 조여지는 것처럼 답답해져 오곤 했다. 어떤 날은 미칠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전화기를 마구 내려치고 집어던져도 풀리지 않을 이 숨 막힘은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찾아오고 또 찾아오는 형벌 같았다. 엄마의 전화는 ‘끝’의 기약 없이 심장이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무리 “바빠서 조금밖에 통화 못해.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 해.”라고 말을 하고, 또 말을 해도 본인의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30분이 넘어서는 날도 있었다.
회사 화장실이나 후미진 복도에서 눈치보며 절절매는 날이 여러 날이었다.
엄마의 전화는 대부분 아빠와 싸우고 나서 걸려 온다. 늘 듣고 듣던 아주 먼 과거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오디오다. 알고 싶지 않은 부부 둘만의 이야기까지, 자식이 굳이 알아선 안 되는 일까지 다 꺼내놓는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오죽하면 내게 저럴까 싶다가도 도가 지나치는 아빠에 대한 험담과 엄마의 자기 합리화, 모든 싸움의 원인을 남 탓으로만 돌리는 구구절절한 자기방어 이야기가 때때로 역겨웠다.
그리고, 하필 네 자녀 중에 나한테만 이렇게 쏟아부어 내는 건지. 왜 하필 나인가 싶었다.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같았다. 엄마가 말로 쏟아낸 감정 오물이 내 온몸에 그득그득 쌓여 독성을 뿜어내는 몇 날 며칠, 나는 지옥에 살았다.
그냥 그 전화 안 받고 안 걸으면 안 되냐고 묻는 친구가 있었다,
평생을 엄마의 강한 기운에 억눌린 내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아주 오랫동안 길들여진 편협한 사회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감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인해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감당해야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번거롭고 버겁게 느껴졌던 때였으므로 나는 그냥 참아내는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스트레스는 내가 결혼하고 독립을 한 뒤에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더 심해져 갔다. 엄마는 전화로 이래저래 아빠에게 전달할 말을 지령 내리듯 ‘명령 아닌 명령’을 ‘부탁’의 형식으로 내리곤 했다. “네가 이렇게 말해주면,...” ,“네가 아빠한테 이렇게 말 좀 해라.”
글을 쓰면서도 다시 그 전화를 받은 것처럼 가슴이 조여오며 박동이 거칠어진다.
내 몸이 아직 이렇게 생생하게 그 감정을 기억하고 있다니 안타까우면서도 언제고 이 감정에서 진정으로 완전 해방 되었으면 좋겠다고 또다시 염원하게 된다.
‘엄마는 바뀌지 않는다’
<나는 왜 엄마가 힘들까> 라는 정서 지지 에세이에서 썸머 작가가 말했다.
이제 용기를 내어 진실을 직면해야 한다고.
나와 같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착취적인 인격장애를 앓는 학대자(나르시시스트) 엄마를 가진 딸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권하거나 ‘그래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라고 주위의 대부분이 말하듯 그리 권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이들은 아마도 끊임없이 힘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이니 ‘용서해야 한다’라는 마음의 갈등을 겪으며 괴로워하고 수없이 좌절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이런 말들이 감사했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용서와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썸머 작가는 저서에서 이런 엄마들을 ‘자식을 감정 쓰레기통이나 에너지 공급원으로 사용하며 끊임없이 남의 자존감을 도둑질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 인격장애를 앓는 학대자 ’나르시시스트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의 저주‘에 걸린 딸들에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엄마 개인에게 있다는 것을 객관화하며, 자녀들의 죄책감과 책임감 따위로 엉킨 내면의 상처와 풀리지 않는 매듭을 보다 덤덤히,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라는 유형이 있다는 걸 알게 됨으로써 나는 마음이 외려 편안해졌다. 우리 엄마와 같은 ’인간 유형‘이 존재하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를 알게 되니 엄마의 지시와 간섭으로부터 반드시 해방돼야 할 ’나‘란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부단한 노력 끝에, 어려운 한마디를 내뱉음으로써 엄마의 전화로부터 벗어났다.
귓속에 쏟아지던 엄마아빠의 싸움 이야기, 험담, 나를 조종해서 상황을 조종하고픈 엄마의 본심들 이제는 더 듣지 않는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는 적어도 전화의 고통에서는 벗어난 상태다.
끊어낼 때 매몰차고 당돌해야 했지만, 나는 “더 이상 내게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마세요!!” 라고 소리치듯 마음 그대로를 내보였던 마지막 날의 통화가, 용기를 끌어 올려 ’할 말‘을 해냈던 내가 정말 고맙다.
아주 가끔 걸려 오는 전화에 여전히 심장이 덜컹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이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자르고 거부할 수 있다.
“엄마는 바뀌지 않는다”
수많은 심리상담사는 나르시시스트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인식하고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잘못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전혀 달라서 모든 잘못과 책임감, 죄책감을 딸에게 전가한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고 고로 바뀔 이유가 전혀 없다.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우선 엄마로부터 최대한 정서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더 이상 여러분의 인생에서 누군가의 허락은 필요 없다.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스스로 원하는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라. 엄마를 포함해 다른 누구의 의견도 중요하지 않다.
이제 더 이상 “바빠서 메시지를 이제 봤어요.”라고 변명할 필요가 없다. 일일이 보고할 필요도 없다. 엄마로부터 정서적으로 분리되고 더 이상 엄마에게 휘둘리지 말자.
엄마를 설득하려 들거나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말자.
이제 엄마의 감정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감정을 돌보아야 한다.
나는 이제 엄마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엄마‘에게서 다른 엄마를 더 이상 꿈꾸지도 않는다.
내 감정을 분리해서 내가 편안한 방법으로 엄마를 대하기로 했다.
엄마의 부재중 전화에 더 이상 불안 게이지가 치솟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처럼 나르시시스트 엄마로 인해, 부모로 인해 여전히 마음 아픈 사람들이,
때론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잠시 모질어도 되는 순간이 있어도 괜찮다는 걸 인정해갔으면 좋겠다.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