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이 되어 꿈꾸던 독립을 했다. 지금 입에 올리기엔 무척 예스러운 말처럼 들리지만 ‘결혼을 통한 독립’, 그것이 결국 해방의 출구였다. 독립이라고 하기엔 조금 늦은 나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학생 때는 막연하게 성인이 되면 내 힘으로 번 돈으로 독립할 수 있을 거란 철모르는 꿈을 꾸었다. 그러기엔 내 깜냥으로 어림도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직장인으로서 사회에 발을 내디딘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사회생활엔 생각해왔던 자유나 해방감 따위는 없었다.
우리 집은 내가 그렇게 성인이 되었어도, 일주일에 두어 번씩 크고 작은 부부싸움이 일어났고 고성과 폭력은 여전했다. 때로는 말리고 또 때로는 그냥 외면해가며 그날들을 견디고 견뎠다. 많지 않은 월급을 쪼개 모으고 또 모아 나이 서른에 결혼으로 독립했다. 결혼자금을 어느 정도 보태주실 수 있는 크게 없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내가 번 ’내 돈‘으로 알아서 시작하겠다고 공표했다. 착한 효녀가 된 양 뿌듯해하며 기특하다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리고 2년이 흘러 아이를 낳았다.
이틀간 지냈던 병원을 나와 조리원에 입소하고 이틀째 되던 날,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아빠의 마이너스 통장에서 이천만원의 돈을 빼내 갔고 이혼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아무도 짐작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분가해 있는 우리들이야 그렇다 쳐도 배우자인 아빠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했다. ’이게 뭔 소린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직도 하혈이 계속되고 퉁퉁 부은 몸 상태였던 난, 엊그제 갓 출산한 ’엄마의 딸‘이었다.
엄마는 출산 다음 날 병원을 찾아왔었다. 드라마처럼 친정엄마의 손을 잡고 산통을 견디다 분만실로 이동하는 그림 따위는 애초에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출산하고 나서 소식을 알리자고 마음먹은 건 당시의 나로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오겠다고 말 꺼낼 엄마도 아니었고 애면글면 안타까워할 것도 아니란 걸 너무 잘 알았기에. 엄마에게서 보통의 누구나가 ’엄마‘하면 떠올리는 그런 애절한 모성은 느껴본 적 없으니까. 설사, 온다 해도 불편했을 마음이었다.
병원을 찾아 머물렀던 짧은 시간 동안 엄마는 내게 평소에 전혀 하지 않았던 행동을 했다. 엄마가 나를 안았다. 평생 없던 일이라 몸이 먼저 반응해 화들짝 놀랐다.
일이 터졌다는 걸 알고 나서야 생각해보니 내게 그래도 티끌만큼은 미안은 했었나 싶었다.
이제 막 해산한 딸이 몸조리할 시기에 하필, 이혼소송을 하고 집을 나가버리시다니.
조금은 날 아낀 날들도 있었다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날 애틋해 한 게 아닐까 생각한 많지 않았던 순간들을 짜깁기해두고, 엄마로 인해 힘들 때마다 그것으로 마음 달래고 위로하곤 했었다. 이 모든 것이 와장창 깨져나가는 날들이었다. 엄마의 여자로서의 인생을 이해해주고 싶었다. 성격 맞지 않는 아빠와 만나 전처의 자식 셋에 본인이 낳은 딸까지 도합 넷을 키워내는 일이 정말 쉽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부부가 이혼을 할 수도 있지 백번을 이해하고, 평생 원수 같던 부부 사이 당연히 끝낼만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지 않냐고 모든 힘을 끌어모아 고함지르고 싶었다.
내가 엄마에게 진짜 딸이라고 여겨진 적 있었던 걸까? 엄마는 아무리 못 견뎌도 한 주, 한 달 정도의 시간이라도 조금만 더 참아냈어야 했다. 자신의 해산한 딸이 적어도 오로가 다 빠지기 전까지는, 몸이라도 정상으로 회복돼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친정엄마’로 있어 주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날마다 조리원에서 울었다. 이혼소송이 진행되는 드라마에서처럼 너저분한 이야기들이 들려와 괴로웠다. 갑작스레 찾아온 충격으로 힘들어한다는 아빠 소식도 들었다. 엄마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엄마 탓만은 아니란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엄마 아빠 둘 다, 정말 내게 너무들 한다 싶은 날들이 여러 날을 흐르고 흘러 금방 달을 넘기고 또 넘겼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듯 동생과 엄마, 언니들 나 그리고 아빠가 편으로 자연스레 갈라섰다.
죄도 없는 동생과는 어처구니없이 너무나 자연스레 남처럼 되어 버렸다.
아이를 낳은 3월, 봄이 시작되던 때 나는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
미운 엄마였어도 친정엄마였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굳건히 지켜내 온 ‘친정엄마’였는데, 그날 이후 엄마는 내게 ‘계모’ 이상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엄마에게 내가 드릴 수 있는 마음은, 그저 한 인간으로서 ‘객체’에 느끼는 연민과 남의 아이를 수십 년간 먹이고 입혀 키워준 여성에 대한 고마움 그 이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