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시작은 백전백패다
달리기를 해보겠다는 다짐은 매번 실패였다.
맨몸으로 다리만 빠르게 움직이면 될 것 같은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몸뚱이의 무게를 온전히 싣고, 내달리는 그 단순함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내 맘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매일 새벽 달리기를 하자
매일 새벽 공복 유산소 달리기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살 빼기에 으뜸이라며, 하루의 기분을 상쾌하고 진취적으로 만든다며 한 유튜버가 나를 꼬드긴다.
단단한 몸집과 새벽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그의 달리기 영상을 보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서는 함께 달리고 있었다.
새벽 기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골에 살면서 어지러이 움직이며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알람은 정확했다.
해가 뜨는 시간이면, 곧장 몸이 눈을 뜨는 신비를 충분히 경험 중이다.
20대에 가끔 한강을 따라 달렸던 달리기가 기억 속 달리기의 끝이다.
나의 달리기는 그로부터 대략 20년 만이었다.
그래도 달리기를 못할 것이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걷기, 달리기는 그냥 알아서 되는 것이라 여겼다.
초등학교 때도 달리기를 따로 배운 기억은 없다.
어둠이 걷히는 새벽녘은 고요하다.
여름 해는 다른 계절에 비하면 부지런도 하다.
이른 6시면 벌써 해가 꿈틀거리며 어느샌가 밖이 환해진다.
그래, 지금이다.
새벽 달리기를 하리라 마음먹었건만, 반항이라도 하는 듯 평소처럼 일어나 지지 않는다.
이전에는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했는데 역시나 '달리기'는 무리였나.
오늘도, 내일도, 다음 날도 나의 몸은 '달리기'를 기꺼이 맞이하지 못했다.
책 읽기나 자전거는 아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면 몸이 알아서 자동으로 움직인다.
밖의 날씨를 살피고, 자전거 타기에 좋은 날이면 옷을 입기 위해 거울 앞에 선다.
위, 아래 간단히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실으면 끝!
밤까지 일이나 동영상 시청으로 잠자리 시간이 늦어졌다.
이럴 때는 아침에 눈을 떠도 뇌가 자전거 타기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은 몸이 너무 찌뿌둥해, 안 탈래.'
'잠이 안 깬 것 같은데, 잠이나 더 자야겠어.'
뇌는 자전거를 타지 못할 이유들을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잠자리에서 눈을 떠 꼼지락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뇌의 걱정거리는 늘어간다.
몸은 이미 '포기상태'다.
이런 상황들을 알아차리고 전략을 바꾸었다.
눈을 뜨면 꼼지락 거리는 시간 없이 화장실로 직행한다.
입안을 개운하게 만드는 칫솔질을 하고, 차가운 물로 얼굴에 물세례를 한다.
이 정도의 일은 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피곤한 몸이어도, 찌뿌둥한 몸이어도 양치와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시작이다.
양치와 세수를 끝내면 다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잠을 활짝 깨운 몸은 '이대로 다시 잘 수 없으니, 자전거나 타러 나가자'하며 다음 행동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윗옷을 입고, 타이트한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는다.
햇볕이 나올 것을 대비해 모자도 쓰고, 팔토시도 한다.
집 밖으로 나가 운동화 끈을 단단히 여미고 세워져 있는 자전거에 엉덩이를 싣는다.
매일 이렇게 자전거를 탄 것이 벌써 3년째이다.
함께 사는 짝꿍(남편)이나 지인들은 새벽마다 자전거를 꾸준히 타는 나를 보며 놀라워한다.
아마도 의지력이나 체력을 엄지를 세워 치켜세우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의지력이 좋거나 체력이 좋아서 자전거를 꾸준히 탔던 것은 아니다.
달리기를 꾸준히 하려고 애써보는 노력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시작이 달리기였으니 실패하는 것이 당연했다.
일어나자마자 달리겠다는 상상만으로도 움츠러들었다.
몸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해 가기 위해 달리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해야 했다.
자전거를 탔던 것처럼 양치나 세수 또는 새로 산 러닝화 신기 정도가 딱이다.
별 의지가 없어도, 체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
애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
그것으로 '시작'하는 것,
그 이후는 시작이 알아서 해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