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강을 건너_5
결혼이란 참 별거 아니구나. 희연이는 생각했다.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성수역 부근의 잡지사로 출근하고, 예민한 촉수로 일들을 처리하고, 점심이면 동료들과 나누는 그저 그런 잡담에 희희낙락했다. 후배들이 “결혼하니까 좋아?” 라고 물었다. 희연이는 고민의 시간도 없이 대답했다. “좋지, 좋아~ 밥 차려주는 남편도 있고 너희들도 얼른얼른 결혼해!”
직장 동료들은 비혼으로 살겠다던 희연이가 결혼을 발표하자,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자가 혼자 살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술자리에서 얼마나 많이 떠들어댔는지, 동료들은 모두 기억해냈다. 희연이는 술에 얼큰 취해서 술자리가 파하려는 직전에 외쳐대곤 했다. 연애는 OK! 결혼은 NO! 동료들은 변해도 너무 변했다며 웃으며 희연이를 손가락질 했다.
29살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희연이는 요새 부쩍 체력적으로 힘들어했다. 결혼이라는 큰일을 치러서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체력이 예전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결혼전에는 야근을 밥 먹듯 했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생생한 기분으로 사무실 책상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야근 횟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요즘 것들의 반란 덕분이기도 했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후배들이 영입되면서 눈치도 안보고 칼퇴근 하는 문화가 처음에는 다소 충격이었는데, 어느덧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칼퇴근 하는 후배의 창의적인 기획력이 유독 돋보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후배들의 배짱도 부러웠지만, 퇴근하고 누리는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더욱 부러웠다. 외국어를 배우는 후배, 글쓰기를 하는 후배, 운동에 취미 붙인 후배까지.
결혼했다는 핑계로 야근 횟수를 줄였다. 잡지 마감이 아니면 가급적 야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집에 일찍 들어갈 수는 없었다. 퇴근 시간 6시를 앞두고, 일을 끝내지 못해 한 두 시간 연장되는 것은 여전했다. 그래도 집에서 찬수가 차린 저녁밥을 먹을 생각에 일을 놓을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이 넘어서도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다. 40분은 꼬박 지하철에 서서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가야한다. 운이 좋으면 앉아서 갈 수 있지만, 그런 운은 자주 오지 않는다. 이어폰을 끼고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그나마 힘듦을 덜 느낄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빠져서 한 창 웃다 보면 집 근처 역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하철에 서 있었다. 10분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갑자기 다리가 휘청거렸다. 눈이 초점이 맞지 않아 화면이 희뿌옇게 보였다. 뭔가 불길했다. 다리에 버틸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급하게 인파를 뚫고 나갔다. 가까이 있는 의자를 찾아 주저앉았다. 숨을 쉬면서 눈을 감았다. 빈혈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월요일이면 아침 조회로 학생들을 운동장에 세우고, 교장의 연설을 하염없이 들어야 했다. 재미없는 그 시간을 꼿꼿이 서서 버틴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한여름에도 아침조회는 진행됐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에 간간히 쓰러지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유독 햇볕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는 것에 약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빈혈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든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 아침조회 문화도 어느 샌가 사라진 듯 했다. 스마트한 기술은 아침조회도 교실에 앉아서 화면을 통해 교장의 연설을 딴 짓 하며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희연이는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30분을 더 가야하는데, 몸 상태가 받쳐주지 않을 것 같았다. 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수야, 나 혼자 집으로 못갈 것 같아.”
“무슨 일이야?”
“너무 어지러워서 네가 데리러 왔으면 좋겠어.”
“응, 어디야? 내가 바로 갈게. 가만히 있어.”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던 찬수는 희연이의 전화에 쏜살같이 달려왔다. 찬수의 눈에 비친 희연이의 얼굴에는 혈색이 없어 보였다. 건강한 사람이면 지녀야 할 불그레한 혈색이 그녀에게서 사라진 것이다. 찬수는 당황하며 희연이를 일으켰다. 병원으로 바로 가자,는 찬수의 요구에 희연이는 집으로 가서 쉬고 싶다고 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니, 바깥공기가 한결 시원하고 상쾌했다. 늘 고약한 냄새를 머금고 있는 지하철 역사를 나오니, 답답했던 가슴이 뚫린 듯 했다. 희연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부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찬수는 양파와, 당근, 호박을 잘게 썰어서 야채죽을 만들었다.
화장을 지우지도 못하고, 곧바로 쓰러졌던 희연이는 밤새 푹 숙면을 취한 듯 했다. 아무 기척도 없이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던 그녀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을 듣고서 자동적으로 눈을 떴다. 찬수는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며 한숨 더 자기를 권했지만, 희연이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출근 시간에 여유가 없어 종종 걸음을 쳐야했다. 10분만 더 눈을 감으면, 그 달콤한 꿀잠의 대가로 아침부터 뜀박질을 해야 할 판이었다. 희연이는 10분 단위로 생활하는 게 익숙했다. 도시에서의 직장 생활이 희연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니,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온다. 방에는 찬수가 어제 저녁 만들어놓은 야채죽이 밥상에 놓여있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부드럽고 하얀 야채죽을 희연이는 한 입, 한 입 입에다 밀어 넣었다. 혀로는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찬수의 마음, 정성만큼은 가슴으로 느껴졌다.
“고마워~”
희연이는 진심이었다. 가까스로 출근을 하고, 모니터 화면 속 이메일 창을 열자 확인해야 할 일처리만 10개가 넘는다. 잠시 멈추고, 텅비실에 들어가 진한 커피를 한 잔 탄다. 커피에 조예가 있는 한 후배가 자기 돈을 들여서 맛이 좋은 원두를 사다놓았다. 역시 요즘 것들은 다르구나. 희연이는 직장에서 후배들의 덕을 많이 보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후배들은 한해가 다르게 잡지사에서 없으면 안 될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으로 들어와 희연이의 가르침을 받던 후배들이 이제 더 이상 가르쳐줄 게 없는 선배가 되어간다는 것이 기특하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보이려는 자신의 존재감이 사뭇 두려웠다. 직장에서 존재감이 없다는 건, 그건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희연이는 잡지사 5년차 직장인으로 작년부터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승진에 목을 매지는 않았다. 입사할 때부터 위로 빨리 오르려는 성공욕은 애당초 없었다. 그보다는 끈질기게 오래 일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빨리 오르려 하면, 가장 빨리 퇴사를 했다.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한 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같이 오르려했던 사람은 심적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거나, 창업을 하려고 했다. 더럽고 치사해서 그 밑에 못 있겠다는 것이다.
잡지사는 경력만 있으면 재취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여자인 경우 미혼에 한해서이다. 결혼을 하고, 거기에 아이가 있다면 그건 전혀 다른 얘기이다. 아이가 있는 유부녀가 재취업이 쉽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다.
어제 쓰러졌던 몸이 회복이 되지 않았는지, 먹은 게 신통치 않아서인지 좋은 커피를 한 잔 마셔보아도, 카페인을 가득 몸속으로 집어넣어도 도통 몸은 살아나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희연이는 잠시 시간을 내서 직장 근처 병원을 찾았다. 약을 처방받고 싶어서였다. 몇 분 대기하자 금세 그녀의 차례가 다가왔다. 의사의 질문에 답하고, 그녀의 지금 몸 상태를 최대한 자세하게 얘기하려 애썼다. 의사는 몇 마디 듣자마자, 오줌을 받아오라며 그녀를 내보냈다.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임신입니다”를 말하고는 임신초기에 조심해야 할 주의사항을 줄줄이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임신’이란 얘기를 듣자, 주의사항 따위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