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강을 건너_6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으로 살려는 건 아니었다. 희연이는 결혼을 결심할 때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아이를 상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찬수하고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한 적은 없었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낳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일을 대충 마치고, 퇴근했다. 찬수와 상의해볼 참이었다. 출산휴가를 쓰고, 다시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선배들 중에서 더러 그런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누가 돌보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예전처럼 일할 수 있는 지 여부가 궁금했고, 일을 할 수 있다면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어려움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동료들도 겉으로는 일과 육아를 해야만 하는 선배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속내는 알 수 없었다. 워킹맘을 위해 대신 야근을 해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피해만 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희연이가 워킹맘의 당사자가 된다고 생각하자, 지난 워킹맘 선배의 아리송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이를 어떻게, 누가 돌봤는지 이내 궁금해졌지만, 질문의 타이밍은 이미 지난 뒤였다. 희연이는 찬수를 앞에 두고 임신 얘기를 꺼낼 자신이 없어, 카톡 메시지를 활용했다.
‘찬수야, 나 임신했어.’
찬수는 메시지를 읽었지만, 한참이나 답장이 없었다. 10분이 지났을까. 답장이 왔다.
‘그래, 축하해. 집에서 더 얘기하자.’
희연이도 딱히 어떤 반응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답장의 내용이 석연치 않았다. 짧은 문장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이런저런 상황을 그려갔다.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확실한 것은 만나서 얘기해야겠지만, 뭘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27살의 찬수는 이제 막 일에 대한 커리어를 쌓고 있었다. 작은 인터넷 언론사지만, 자기 주도적으로 취재할 수 있는 권한이 컸다. 그 책임도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지만 그로 인해 한층 성장했다고 자부했다. 처음부터 메이저 언론사에 지원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길을 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메이저 언론사는 남들 눈에는 그럴듯한 명함이지만, 기자로서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많았다. 위에서 내려주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기자는 찬수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안정적인 길이 주는 안락함 보다는 젊을 때 할 수 있는 도전이 그의 구미를 당겼다.
특별 기획을 구성해서 대박을 터뜨린 기사도 몇 건 생겼다. 찬수는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박봉의 월급을 받으며 가끔 동기들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면 면목이 서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대박을 터뜨린 기사를 아무리 떠벌려 보아도 친구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래봤자, 유명하지도 않은 인터넷 언론사 기자면서. 속으로 비웃는 것만 같은 친구들의 표정에 얼마나 기죽곤 했는지. 친구들이 모두 잘나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묻는 질문은 “그래서 너 연봉 얼마냐?”가 되곤 했다. 모두가 알만한 직장이 아닌 것은 그래도 참을만한데, 연봉을 묻는 질문에는 솔직해지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뻥튀기를 하면서 거짓말을 해봤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그 정도 현실감은 다들 빠삭했다.
희연이가 결혼하자고 말했을 때, 찬수는 환영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몇 날을 뒤척였다. 희연이를 놓치지 않으려면 결혼은 해야 했고, 결혼을 해서도 이전처럼 일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한 것이다.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보면 다들 결혼하고서도 일은 이전처럼 곧잘 해냈다. 아니, 오히려 밤샘을 더 자주 하며 열성적이 되곤 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한시름 놓기도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희연에게서 임신했다는 말을 카톡으로 전해 들었다. 찬수도 아이를 낳지 말자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희연이와 마찬가지로 기약 없는 ‘언젠가는’이었다. 현실적인 찬수의 입장에서는 좀 넓은 집을 장만하고서가 적당한 때였다. 지금은 찬수의 학자금 대출을 희연이의 모아 놓은 돈으로 다 갚고 적자가 아닌 0원, 제로였다. 집 장만과는 한참이나 먼 수치였다. 서울에서 집을 갖겠다고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건 아니다. 아이를 키울만한 쾌적한 집이면 되고, 경제력이 되는 만큼 월세나 전세도 괜찮은 정도로 수준을 낮추었다. 그래야만 희망이 보였다. 천정부지로 올라있는 집값은 부모의 덕을 전혀 볼 수 없는 젊은 부부에게 때로는 고문이 되었다. 고공행진을 하는 숫자가 짓누르는 현실감은 희망조차 꿈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은 엎질러졌다. 엎질러진 물을 돌이킬 수는 없다.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치울까를 고민하면 된다. 희연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어떻게 돌볼 것인지 그것만 고민하면 된다. 찬수와 희연이는 옥상의 간이 의자에 앉아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희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찬수야, 갑자기 아이가 생겨서 나도 좀 당황스러워. 뱃속에 생명이 꿈틀거린다고 상상하면 마냥 좋아지다가도, 이 꿈틀대는 생명이 뱃속을 빠져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막연한 걱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도 해. 우리 둘 다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까. 너는 어때?”
“나도 물론 좋아. 내 아이니까. 하지만 아빠가 된다고 생각하니 부담되기도 해. 이 옥탑방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고민이 되는 거야. 네가 배가 부르면 4층 철계단은 너무 위험해.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러면 집부터 구해야 하는데.”
고민을 터놓자, 희연이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찬수가 아이 낳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것만 도 안심이 되었다. 일단, 아이를 낳는다. 공통된 그 마음만으로 희연이는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애 엄마가 된다. 그 사실을 당면하자, 묘하게 엄마처럼 강해져야 한다는 의지가 생겼다. 여자와 엄마와의 차이가 이토록 극명하게 대비되는지 희연이는 새삼 온몸으로 느껴져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희연이의 임신 초기 상태의 몸을 관리하는 게 급선무가 되었다. 집 문제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지하철에서 여지없이 쓰러질 수 있는 몸을 돌봐야했다. 그녀는 동네 근처의 믿을만한 산부인과를 검색했다. 나름 평판이 좋고, 친절하고, 이왕이면 출산할 때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지 까지 조사했다. 마음에 드는 산부인과를 선택해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았다. 임신 초기 주의사항에 대해서는 몇 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희연이의 빈혈과 입덧은 임신 초기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이었다. 입맛도 없고,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핑 돌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일이 어려운 난관이었다. 자리에 앉아 가면 괜찮았지만, 배도 부르지 않은 상태에서 임산부석에 앉으면 괜시리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었다.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임산부입니다’ 뺏지를 가방 밖으로 잘 보이게 붙이기도 했지만,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건 여전했다. 나이가 연로한 어르신이라도 서 계시면 그 자리는 바늘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엉덩이가 의자에 차분히 붙여지지 못하고, 들썩들썩 일어날까 말까 머릿속은 끊임없이 시소를 탔다. 하지만 퇴근 시간의 지하철에서는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도 없이 냅다 자리로 달려가 착석한 후, 잠에 들기 일수였다. 아이는 너무 작아 무게감이 전혀 없었지만, 임산부의 몸은 철근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축축 처져 있었다. 희연이는 잠이 들어 정차해야 할 역을 놓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 몇 정거장 되지 않을 때는 택시를 타기도 했다. 한 푼이 아쉬운 때였지만, 희연이의 몸은 사람으로 붐비는 지하철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찬수는 희연이의 갑작스런 임신이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아이가 생긴 것은 좋아할 만한 일이지만, 2세 계획을 찬찬히 말했다면 몇 년 뒤에 갖자고 얘기할 참이었다. 그런 데 상의도 없이 벌컥 일을 벌 린 것만 같아 찬수는 화도 났다. 하지만 화를 희연이한테 풀 수는 없었다. 피임의 몫은 희연이도 있지만, 찬수도 똑같은 크기로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희연이는 생리주기가 일정해서 대략의 가임기와 생리주기를 찬수는 파악하고 있었다. 가임기에는 되도록 콘돔을 꼭 끼려고 했다. 희연이가 먼저 챙긴 적도 있지만, 찬수도 그만큼 챙겼다. 피임을 위해서는 먹는 약도 있었지만, 희연이는 피임약 먹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부작용으로 변비가 심했다. 잘 싼다는 것이 삶의 질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지, 희연이는 곧잘 찬수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곤 했다.
술을 먹은 날은 아니었다. 맨 정신이었지만, 사랑을 나누기에는 충분할 만큼 뜨거웠다. 찬수는 젊었고,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정력이 있었다. 희연이가 먼저 다가온 것 같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찬수는 찬찬히 오래도록 희연이를 애무했다. 몸이 달아올랐고,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몸이 섞였다. 이성이 자리할 타이밍은 놓쳤다. 콘돔은 잊혀졌다. 그러니, 찬수는 희연이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