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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서울의 밤

결혼이라는 강을 건너_8

by 홍시

찬수의 여동생 주연이 커다란 캐리어를 힘겹게 끌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별다른 가구도 짐도 없는 작은 방 하나는 앞으로 태어날 솔이의 방이었다. 솔이 만을 위한 공간, 그 작은 방은 갓난아이 특유의 젖비린내와 살 냄새로 가득할 계획이었다. 흑백 모빌도 걸고, 딸랑이도 옆에 두고 솔이 침대도 놓으면 얼추 구색이 갖추어지리라, 그렇게 희연은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역시나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다. 찬수는 희연이를 불러 주연이의 상황을 얘기했고, 안타까운 표정을 한껏 지으며 희연이에게 부탁을 했다.


“희연아~ 솔이 방은 차차 만들자. 신생아 때는 우리랑 같이 지내는 게 정서적으로도 더 좋대. 내가 어디서 봤어. 주연이가 딱하잖아. 돈 한 푼 없이 서울로 상경해서 어떻게 지내겠어. 몇 년, 아니 1년도 좋아. 직장 구하고, 원룸이라도 얻어서 나갈 형편 될 때까지만.”


마음이 약해졌다. 결혼을 하니 희연이의 마음은 물렁물렁 해졌다. 누구보다 대쪽 같고 단단해서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서 누구보다 당차게 살아갈 수 있었다. 직장에서도 직선처럼 쭉 뻗은 성격으로 일처리를 해서 나름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자, 마음이란 게 있는 사람인가 싶도록 헐렁해졌다. 주연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여기가 내 방이야? 너무 좋다. 내가 오빠 덕도 보고 결혼 잘했네. 책상 하나랑 옷장 하나만 사서 넣으면 딱 이겠는걸.”


출산 한 달을 앞두고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희연아~ 솔이는 잘 크고 있지. 주연이가 부산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고 싶다고 하더라. 서울에서 어떻게든 직장 구해서 살아 보겠다는거야. 아마 오빠가 서울에 있으니 그런 생각이 더 굳어진 것 같다. 주연이를 이전에도 봐서 알겠지만, 그렇게 염치없는 아이는 아니야. 너 애기 낳으면 옆에서 조금이라도 도울 거고, 서울에서 기반 잡을 때까지만 그 집에서 사는 걸로 하자.”


찬수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였다. 희연이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결정은 내려졌고, 통고였다. 주연이 하고는 이전에 몇 번 본 적 있었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지, 화장도 짙고 옷도 유행에 맞춰 입고 있었다. 여대생이면 충분히 멋 부리고 할 정도였으니 딱히 나쁘지 않았다. 쾌활하고, 낯가림이 적은 지 첫 만남에도 쉴새 없이 말을 했다. 함께 식당에 들어가면 먹고 싶은 메뉴가 있다며 메뉴판을 먼저 집어 들고 시원시원하게 주문했다. 우물쭈물 뭐가 먹고 싶은지도 모르게 꽁하게 아무 말 안 하는 것보다야 좋았다. 그리고 주연이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잡지사 편집 일을 하는 희연이를 전문직 여성으로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 존경어린 표정과 시선에 희연이는 우쭐해졌고, 주연이를 만나면 뭐든 퍼주고 싶어졌다. 뭘 해도 밉살스럽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어려운 일이 많을 테고, 혈기 왕성하고 젊은 주연이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희연이는 손익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서 남는 장사겠다는 판단이 서자, 시어머니의 전화에 ‘점수 좀 딸까’ 하는 심보로 대답했다.


“그럼요, 저희가 좋죠. 주연이가 워낙 싹싹하고 부지런하잖아요. 알아서 잘 할 테니 걱정은 없어요. 안 그래도 졸업하면 어떻게 하지 고민할 때 ‘서울에 와서 살아!’라고 조언한 적도 있는 걸요. 그때는 옥탑방에 살고 있어서 차마 ‘우리집으로 와’라고는 못했는데, 이제 방도 2개니까, 문제없죠. 직장도 천천히 구하다보면 구해질 거예요. 서울의 일자리는 많은걸요. 눈높이만 좀 낮추면 직장이 뭐 대순가요. 출산하면 100일정도 아이랑 단둘이 지내야 하는데, 적적하지도 않고 좋겠네요.”


시어머니는 지방에서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장사를 해서인지 사람들의 동향을 빠르게 감지했다. 며느리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희연이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책임지고 해야 할 도리에 있어서는 여느 시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빠가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구닥다리 전통은 버젓이 현대에서도 진행형이었다.


희연이는 살가운 애교를 부리며 일부러 친한 척은 못해도 시부모님과 잘 지내면 좋지, 싶었다. 찬수를 사랑한다면 부모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사랑의 유효기간이 한참 남아 있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남들 하는 만큼이라도 하고 싶었다. 때가 되면 안부전화를 하고, 명절이나 가족행사가 있다면 선뜻 가겠다고 나서고,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옷의 스타일로 입고 방문하려고 했다. 옷가게를 하는 시어머니는 자신의 취향대로 옷을 입어주는 며느리를 제일 사랑스럽게 바라봐주었다. 종종 시어머니는 옷가게의 옷을 희연이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 옷을 입으면 시어머니는 입이 귀에 걸리곤 했다. 그 정도의 노력은 할 수 있었다. “어머니~” 뒷부분의 억양은 올리고 콧소리를 내면서 간드러지게 부리는 애교보다는 훨씬 쉬웠다. 몇 번만 눈 꼭 감고, 감수하면 1년이 편안한 것이다.


서울의 밤은 어둡기 보다, 화려하다. 해가 지면 가로등은 빛으로 세상을 밝힌다. 상가 가게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화려한 불빛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밥 가게든, 술가게든, 옷가게든 크게 다르지 않다. 간판의 네온싸인은 형광으로 눈이 따가울 정도로 빛을 쏘아댄다. 해가 휘영청 떠있는 오후보다, 간판에 불이 켜지는 저녁이 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생기를 띠곤 한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들어갈 구멍을 찾는다. 주연이는 부산이라는 도시에 살았지만, 서울은 부산보다 훨씬 화려하다고 탄성을 내질렀다. 불빛에 나방이 몰려드는 것처럼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그 황홀함에 빠져 주연이는 저녁마다 서울 나들이에 열을 올렸다. 주연이의 부산 친구들도 서울로 올라온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서로 약속을 맞춰 서울 구석구석 탐색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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