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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Apr 20. 2021

허구로 진실을 만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에 대한 오래된 질문



쓰기의 초라함에 흔들렸습니다.

어머니의 병환이 있었고 글쓰기에 대한 주저함이 왔습니다. 시커먼 일상의 때를 묻힌 행주 같은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쓰기는 누구를 구원할 수 있는지 반문했습니다. 쓸 수 있을까, 회색빛 초라함이 바다 위의 조각배처럼 하염없이 흔들렸습니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제가 서 있는 곳에 머리를 박고 빙빙 돌았습니다. 뱉어 놓은 글들이 부끄럽고 꼴 보기도 싫었습니다. 기웃거리는 글들이어서 삭제를 해버릴까 몇 번을 망설였습니다. 고작 매거진을 정리하는 정도로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초라함도 내 삶의 일부라고, 또 다독였습니다.




글쓰기에도 사춘기가 있나 봅니다.

괜한 트집을 잡고 삐죽거리며, 나에게 허망한 질문을 던집니다. 요즘 누가 글을 읽는다고. 글은 이제 한 물갔어. 넷플이나 유튜브가 대세야. 누가 조잡하게 엮은 한숨 나부랭이를 주워 들을까.

"대체 무엇을 쓰고 싶은 거니?"

"왜 자꾸 쓰려는 거야?"

내 안의 다른 내가, 나를 공격했습니다. 글쓰기의  무용을 들먹였다가, 세태를 원망했다가, 제 안의 욕망을 의심했다가.


그 흩어지는 마음들을 벚꽃처럼 흩날리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물처럼 생각을 풀어놓았습니다. 쓰기의 무용론이 대세인 날은 쓰지 않았고, 화려한 영상의 대세론에 밀릴 때는 또 주류에 몸을 맡겼습니다.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 때는 출간 작가들의 경험담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들이 저를 통과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움이 소설처럼,

소설을 향해 피어났습니다.

벚꽃이 진 자리에 연초록 입이 돋아나는 날, 찬란한 봄날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혼돈도 없었던 날.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다 갑자기 소설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누군가 숨겨둔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도서관을 향했습니다. 꽉 조여둔 매듭이 풀린 것처럼, 난데없이. 갈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무침 절절함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소설을 놓은지 한참이었습니다.

마음의 기갈이 들었나 봅니다. 허겁지겁 도서관 2층을 올라가 800번대의 책들을 다정하게 뒤적였습니다. 쿰쿰한 종이 냄새가 마음의 허기를 꽉 채웠습니다. 책맛이 도는 모양이었습니다.



박완서를 들었다가 제 자리에 놓았습니다. 엄마 손길 같은 책 보다 팔딱이는 심장 닮은 책을 고르고 싶었습니다. 그게 뭐지. 보석이라도 숨겨둔 모양 프랑스와 영미문학을 뒤적였습니다. 카뮈의 이방인이 눈에 띄었지만 또 건넜습니다. 영미문학을 돌아 다시 단편으로 왔습니다. 낡고 보푸라기 끼인 책들이 욕망을 방망이질 했습니다. 너희들을 두고 내가 무슨 헛짓을 한 걸까.



모르는 작가들의 소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성공했습니다. 작가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유명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했을 것이라고. 제가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책을 손으로 쓰다듬었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쓰기에 대한 방황을 했겠죠. 돈이 되지 않는 글을 쓰느라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깜박이는 커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커피를 그릇째 마셨을 테고,  쭉 써 내려간 글들을 다시 지우며 떠오르지 않는 마땅한 단어들을 찾아 이책 저책을 기웃거렸을 겁니다. 손이 붓거나 눈이 충혈되기도 했을 겁니다. 책 하나 쓴다라는 말을 감히 함부로 하다니요.



쓰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일이 없거나,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운명을 선택했거나.



성공이나 유명해지는 것의 여부를 떠나 글쓰기는 그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숙명이나 운명이 아닐까.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지 않으면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마음이든 삶이든 비워 있는 것을 채우는 것이 글쓰기의 본래 의미라고, 겨우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세계의 끝 여자 친구(김연수)와 너는 너로 살고 있니(김숨)의 소설을 비롯해 다섯 권의 책을 대여했습니다. 가뿐한 마음에 바람마저 상쾌했습니다. 빨리 소설을 읽고 싶어 마음이 건질거렸습니다. 배를 깔고 엎드려 표지가 너덜해진 작가의 책장을 넘기며, 해미와 밤메 사이를 오갔습니다(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김연수)



서사 안에 잠재된 의미를 꼼지락거리다 보면 작가가 쓴 문장이 들어와 귀띔을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놓칠 때도 있고 깊이 주워 담을 때도 있습니다. 소설이 주는 매력인 셈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들어가 작가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어려울 때도 있지만 작가의 시선과 눈이 맞으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사유와 성찰을 주는 대목도 귀한 경험이 됩니다.



다시 소설,

날림으로 써 놓았던 필사 노트를 정리하며 문장의 라임을 짚어 가보고자 합니다. 소설을 만나며 남겨두었던 흔적을 매듭 지어보려 합니다. 소설속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그것들이 제 안에 자리하겠지요.



허구가, 허구가 아닌 것으로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모든 세계는 이야기의 창조로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삶의 와중에 이야기 하나가 성큼 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쓰기의 사춘기가 무사히 지난 것 같은데 여드름의 자국이 남았더라도, 괜찮다고 위로해주세요.



봄날, 뜸했지만 울렁거렸던

그간의 제 맘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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