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이야기를 해야겠다

세상 끝의 신발

by 양아치우먼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가짜라는 것을 먼저 알려야겠다. 유리로 만들어진 구두를 신고 왕자와 춤을 춘다는 건 동화 속이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 딱딱한 유리로 만든 신발을 신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뒤꿈치가 까이고 움 팩 패인 발 바닥이 고통받아 춤은커녕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유리구두에 세뇌당하지 않도록 동화를 바꾸어야 한다. 신데렐라가 신은 것은 유리구두가 아니라 하이힐이었다고. 유리구두는 애초 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신발 바꿔 신어. 열다섯 소년병이 말했다.

이걸 신고 달려. 열다섯 소년병은 어둠 속에 엎드려 열여섯 소년병의 신발을 벗겨 바꿔 신었다. 온전한 신발이었다. 살아 남아.



구두는 이상이고 운동화는 현실이다. 차 트렁크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까만 구두와 코발트블루의 구두. 비싸게 주고 샀다. 어느 날, 에이라인 스커트 입고 나도 럭셔리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이상한 욕망이 꿈틀땔 때 산 구두는 24만원짜리. 그러나 지금까지 그 구두를 신은 횟수를 모두 세어봐도 10번 안쪽이다. 일일 단가 2만 4천 원.


출장을 가는 날이면 지하철이고 역이고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에 구두를 손에 잡다가도 아니야, 운동화를 껴신고. 운전을 오랫동안 해야 하는 날이면 구두 뒤축을 중심으로 잡아야 하기 때문에 발이 아프니까 당연히 운동화를 신고. 모처럼 차려입고 구두를 신고 나갔다 오면 통통 부은 발이 화가 난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오후만 되면 발이 통통 붓는 증상은 나를 아줌마로 각인하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현상이다. 구두를 신지 못할 변명이 점점 늘어가는 나이, 구두를 영영 신지 못할까봐 무섭다.



저 슈즈 안에 그 뭉개진 발톱들과 아픔과 슬픔과 종내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전진을 느끼게 하던 그 발이 들어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 구두를 트렁크 안에 싣고 다니며 본전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일일단가를 계속 낮추고 싶은 마음, 뒤축의 굽이 올려 주는 높은 하늘 공기를 맡고 싶은 당당함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각또각, 명료한 소리가 주는 자신감있는 걸음을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구두는 나를 긴장하게 하므로, 때론 긴장감이 주는 신선함이 나를 자극하므로 나는 구두를 여전히 트렁크 안에 넣고 다닌다.



어릴 적 샌들 이야기를 해야겠다.

여덟 살 무렵 유행하던 신발이 샌들이었다. 분홍색 발등 부분에 캔디의 노란 머리가 그려진 샌들을 엄마가 동생것과 같이 사 왔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캔디 만화가 유행할 때였다. 너무 좋아서 엄마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신발을 껴안고 잠을 잤다. 싸구려 고무 냄새가 났지만 그 냄새마저도 좋았다. 샌들을 신은 내 발도 신이 났겠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뛰지 말아야 했었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그 짧은 거리를 뛰는 바람에 아뿔싸 샌들의 옆 이음새가 뜯어지고 말았다.



신발이 너덜거렸다. 발을 아무리 작게 오므려도 캔 뒤는 일그러졌다. 눈물이 났고 마루에 앉아 엉엉 울었다. "뭐가 요래 부실하니."

아버지는 떨어진 신발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아랫채에서 연장 도구를 가져왔다. 발등을 덮은 이음 끈과 신발 밑창을 연결하는 지점에 작은 못을 박았다. 외형상으로는 완벽했다.

"요래 신어봐라. 신길랑가."



다음날 그 샌들을 신고 학교를 갔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발밑에 박힌 못이 통통 튀어 올라 내 발 바닥을 찔렀다. 샌들 밑창은 폭신해서 내가 걸을 때마다 못이 조금씩 위로 솟구쳤다. 친구들 앞에서 내색은 못하고 발은 걸을 때마다 아프고, 못을 박아준 아버지가 미웠다. 내가 내팽개 친 샌들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마루 밑에서 오랫동안 우리 집 멍멍이 캐리의 장난감이 되었다. 외롭고 슬프면 울어야 되는 게 정상이다.



처음에는 그냥 그래 보았던 것이 나중엔 마음이 슬프거나 고독해지면 순옥 언니의 부츠를 끌어내려 그 속에 발을 넣어보곤 했다. 그러면 순옥 언니의 다정한 손길이 내 등을 다독여주는 듯했다. 그 영향이었을까.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 지면 그 사람 신발에 발을 몰래 넣어보고 싶다.



남편과 함께 끈을 버클로 조절할 수 있는 트래킹화를 구입했다. 매일 저녁 산책을 나가면서 트래킹화를 신었다. 현관을 나서며 나는 그냥 신발을 구겨 넣고 남편은 늘 구두 손으로 뒤축을 받치고 발을 밀어 넣었다. 얼마 전에 보니 발 뒤꿈치 부분이 닿아 헤어져 있다. 내 반응에 남편이 자기 신발을 살피니 남편 뒤꿈치는 멀쩡하다.

"신발을 그렇게 구겨 신으니, 그럴 수밖에. 뭐가 야무진 게 없니?" 핀잔이 쏟아진다. 습관 하나가 신발의 변형을 불러오는 것도 신기하다. 남편 몰래 신발장 안에 들어 있는 남편 신발을 살피니 신발안마다 습기 제거제(김안에 있는)가 들어가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이 신발이라면

그 신발이 내게 와 어떻게 변형되는가는 각자 삶의 모습이다. 함부로 신발을 구겨신듯이 시간을 마구잡이로 밟고 돌아다닌건 아닌지 , 조금 두려웠다. 몇 십년을 같이 살고도 습거 제거제가 들어 있는 남편의 신발을 이제서야 발견하다니.



타인의 신발 속에 발을 넣어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2009년 신경숙의 단편 <세상 끝의 신발> 속에는 화자와 발레리나와 스키선수와 아버지와 낙천 아저씨와 순옥 언니의 신발이 등장한다. 신발은 곧 그 사람의 삶이다.


그 삶을 닮고 싶을 때 사람을 좋아하게 될 때 손을 포개듯이 그 사람의 신발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는 것은 사랑과 연민의 시작이다. 그것으로 한때 위로 받았던 우리가 지금은 그런 것들과 멀어져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내 삶을 꾸리는 데 벅찬 나머지 타인의 삶에 점점 무관심해진다고, 만다라처럼 무수한 발자국들을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딸이 신었던 플랫슈즈에 발을 넣다가 말았다. 생각보다 내 발이 너무 컸다. 신발이 늘어날 것 같았다. 아직 너의 세상은 작고 아담하다. 다행이라고. 남편의 운동화에 발을 넣었다. 단단하고 야무지고 폭신했다. 남편의 세상은 조금 튼튼해 보였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새벽일을 나가는 남편 운동화를 살짝 나도 돌려놓았다.



신발을 신었던 사람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이야기, 세상 끝의 신발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삶에 귀 기울이게 하는 소박한 소설이다. 엎드려 붓꽃에 코를 갖다 대게 하는 이상한 힘을 지닌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당신, 누군가의 신발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손길이 언제였는지 묻게 한다.


나는 토방 위 순옥 언니 신발을 신기 좋게 돌려놓았다.




[단편소설]


모르는 여인들 책중에서 <세상 끝의 신발>

신경숙 지음/ 문학동네

2009년 여름, 문학과 여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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