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스콧 피츠 제럴드의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은 소중한 것을 5분 만에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릴적 낸시를 짝사랑했던 도널드 플랜트는 오랜만에 재회한 그녀와 추억을 회상하며 뜨거운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다. 우리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면 굉장한 일이 아닐까, 라는 말은 사랑에 이미 빠졌음을 의미한다. 낡은 앨범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던 중, 어긋나는 기억!!!
낸시가 어릴적 사랑했던 남자는 도널드 플랜트가 아니라 도널드 바워시였다. 그 사실을 확인 한 뒤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랑이란 감정.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버린 낸시가 소문을 걱정하는 걸 보고 주인공은 낸시가 나쁜 여자였음을 확인한다.
세 시간 동안 빠질 수 없었던 사랑에 빠졌다가 소중한 추억을 도둑질당해버리는 곤혹을, 대수롭지 않다고 했지만 대수로운 일임을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160여 가지의 단편소설을 남긴 피츠 제럴드의 이야기를 여기로 데려 온 이유는 우리가 흔하게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랑을 매듭짓는 일이 꼭 유쾌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행여 지나간 사랑이 그대를 유혹할지라도, 과거의 순백했던 마음은 그때 그 시절로 묻어두자고 권유해본다.
주인공이 비행기를 갈아타기 세 시간 전 낸시를 찾아내 전화를 건다.
"지금 어디 있니?"
"공항에 나와 있어. 몇 시간만 있을 거지만."
"그럼 이리 와. 만나자."
"자려던 거 아니었어?"
"아니, 아니야!" 그녀가 큰소리로 말했다. 여기 혼자 앉아서 하이볼을 마시고 있었어."
[오랜만에 재회한 그녀와 서먹할까 두려워했지만 그의 칭잔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뜨거운 키스까지 나눈다]
"예전부터 넌 사랑스러운 애였어. 근데 이렇게 아름다워진 모습을 보니 조금 놀랐는 걸."
[오래된 추억은 가끔 다를수 있다. 사랑했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다. 앨범을 가져와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너라고 짚은 녀석은 내가 아니다.]
도널드는 5분 동안 앉아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우선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사건을 동일한 방식으로 기억하기란 아예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어린 시절 낸시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듯이 성인 여성이 되어서도 그의 마음을 흔든다는 게 놀랍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세상을 뜬 후로 느끼지 못했으며 다시는 느낄 가망이 없다 여긴 감정을 30분 만에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앨범 속에서 그녀가 가리킨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닮은 도널드 바워스였다. 그녀는 자신을 바워스로 착각한 채 사랑을 나눈 것]
"아니, 아니지. 넌 도널드 플랜트구나."
그녀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일어섰다.
"플랜트! 바워스! 내가 미쳤나 봐. 술 때문인가? 널 처음 봤을 때 좀 착각했던 모양이야. 이 사진을 보라고! 대체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거니?"
[마지막 문장]
도널드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그 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전은 이런저런 것들을 버리는 기나긴 과정이기에 그가 방금 경험한 것은 별 대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 피츠 제럴드의 소설을 흉내내어 봅니다.
굳이 말하자면 첫사랑, 대학교 때 좋아했던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가 결혼 한 뒤 3년이 지난 때였다. 같은 동아리 멤버였던 그녀는 그보다 네 살이 어렸지만 신중하고 천성이 착했다. 삼겹살 기름이 허옇게 둘러붙은 불판을 맨손으로 씻는다든지, 난장판인 술자리를 순식간에 치운다든지. 또래의 여자 친구가 토악질을 할 때 화장실로 데려가 뒤처리를 한다든지. 선한 눈매처럼 마음 씀씀이가 착했다.
그가 몇 번을 사귀자고 고백했지만 그녀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거절했다. 그러고도 동아리에서 만나면 여전한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거라고 짐작했다. 그를 좋아하기는 할 거라고. 누군가에게 한번 마음을 주는 사랑은썰물처럼 흔적을 남긴다. 바싹 말라버린 옷처럼 감정이 통째로 말라버리는 것은 아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소식이 궁금했던 그녀가 먼저 보고 싶다는 (만나자가 아니라 보고 싶다고) 전화를 했을 때, 그는 그녀와 함께 다녔던 동아리 M.T의 어느 산장, 혹은 대학교 잔디밭 광장이 떠올랐다. 홍옥을 베어 문 기분이 밀려왔다. 맑은 하늘처럼 파아랗고 하얀 운동화처럼 산뜻한 20대 청년의 아련한 마음은 그녀와 만나기로 한 일주일 내내 그를 들뜨게 했다.
거울을 보며 이유 없이 콧수염을 욱신거려 보고 이마 주름을 찡그려 보고, 바르지 않던 로션을 목까지 정성껏 발랐다. 전화로 선배, 보고 싶네요,라고 말하던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는 나긋하고 여전히 부드러웠다. 이제 막 출산을 한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런 약간의 들뜸은 그에게 생기를 주었다. 미묘한 흑심이 자신도 모르게 꿈틀대고 있는지도 몰랐다.
네이비블루 쟈켓을 걸친 그녀의 손목은 반쯤 맨 살을 드러내서 전형적인 커리우먼임을 짐작케 했다. 풋풋함은 사라졌지만 풋풋함을 밀어낸 자리에 들어선 안정감은 여전히 그녀를 착해 보이게 했다. 단정함과 서글서글한 웃음은 그대로였다. 사람의 천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떤 관계, 사이가 아니더라도 한 번씩 안부 정도는 나눌 수 있다. 사람의 사이란 건 어떤 단어로 반드시 정의될 필요는 없다. 그는 잘 마시지 않는 자몽주스를 시켰다. 딸기주스보다는 자몽주스가 훨씬 더 세련돼 보일 것 같았다.
시시한 말들, 사는 동네의 위치라든지, 남편이 출장을 자주 다닌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공기를 떠 다닐 때 그녀는 옆 자리에 모셔둔 반듯한 네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미용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제품이에요" 그녀가 내민 것은 다단계 화장품 광고 리플릿과 코발트블루 병에 든 샘플이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나면 폭삭 늙는다. 지금부터 관리해줘야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선배가 이런 걸 안겨주면 아내가 엄청 감동할 것이다. 자몽주스는 신맛인지 단맛인지, 원래 알갱이들이 입안을 맴도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말없이 그녀가 건네는 리플릿을 뒤적였다. 종이 재질은 두껍고 광택이 났으며 넘기는 손길 사이로 코발트블루 병 화장품의 가격은 27만 원, 아니 2백7십만 원이다. 27만 원이면 어떻게 비자금으로 후려 칠 수 있었지만 2백7십만 원은 너무 큰 금액이다. 한 달 급여와 맞먹는 금액을, 이제 외벌이가 된 그가 툭 지를 수는 없다. 스물다섯이 아니라 서른넷인 그, 상대방에게 관계로 낚이는 기분을 유연하게 처리할 줄 아는 연령대다. 그 돈이면 사고 싶었던 얇은 노트북을 사고도 남을 돈인데.
"이거 다단계지?"
자몽주스를 단숨에 들이켠 그는 그녀에게 정색하며 물었다.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다단계 이런 거 손대지 마라. 나 다음에는 또 대학 동아리 누군가에게 전화하겠지. 좋은 선후배 관계 이렇게 다 무너진다. 네가 다단계 한다고 소문나면 한 두 명씩 네 전화 거부할 거다. 그렇게까지 돈 벌어야 하나. 다른 일 찾아라. 충분히 똑똑하고 능력 있는 너다. 공기는 금새 차가워졌고 둘은 서둘러 약속이 있는 사람들처럼 다급하게 헤어졌다.
나들이 차량으로 토요일 오후 시내는 북적거렸다. 아내가 출산을 했던 엔젤 산부인과 앞을 지나며 그는 생각했다. 천사도 아이를 낳을까. 산부인과 상호를 엔젤이라 지었는지 그는 궁금했다. 착하다는 건 어떤 건지, 그녀가 정말 착했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산부인과 옆 꽃 가게에서 베이지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노란 프리지어가 한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밀리는 차선에서 간신히 차를 빼 프리지어 한 다발을 샀다. 2백7십만 원짜리 화장품보다 이 프리지어 한 다발이 착한 사람을 감동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깊고도 은은한 프리지어 향이 차 안을 넘어 그의 마음속으로 점령해 왔다.
대학교 후배를 만나러 간 한때는 ctrl+alt+del하고 어딘가로 숨고 싶은 시간이어서 그는 프리지어가 떨어져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운전했다. 별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스콧 피츠 제럴드 지음/ 옮긴이 류봄
*현재 실망한 것 때문에 과거 그 사람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지나간 인연은 차라리 아름답게 묻어 두는 게 예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