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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Oct 19. 2020

샤인 머스캣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다

돈의 기쁨과 슬픔, 샤인머스캣 한알 250원


쓰다는 동사에 강한 여자

일단 나는 쓰고 보는 스타일이다. 돈도 쓰는데 겁이 없는 편이고 글도 먼저 쓰고 본다. 쓰다라는 동사에 보통보다는 자질이 많은 나, 쓰다라는 동사에 전혀 끼도 의지도 없는 남편은 영양제외에는 도통 소비를 모른다. 덕분에 우리 집 숫자 정산과 가계 운영은 착한 늑대가 12년째 하고 있다.

코로나로 세 아이 모두가 집에서 삼시 세 끼를 해결하다 보니  이번 달 생활비가 70만 원이 더 나왔다고 착한 늑대가 한번 주의를 주기는 했지만 숫자에 민감하지 않은 나는 그냥 예사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팔백동 우리 집은 먹는 일만큼은 충실하다. 실하고 뜨끈뜨끈한 밥 한 그릇을 야무지게 먹고 숟가락을 놓으며 뭐 묵울 거 없나라고 할 때, 지금까지 식탁 위에서 질주했던 젓가락들은 뭐였지 하는 생각이 든다.밥 다음 당연히 제철과일 먹는 게 2단계,  3코스가 빵이나 과자류다. 이 중에 뭐라도 빠지면 왜 이리 허전하지?라고 말하는 종족들, 지나친 인풋에도 불구하고 다들 정상인 체중보다 모두 미달이어서 애꿎은 내 뱃살만 맨날 구박받는다.


샤인 머스캣 한알에 250원

일주일에 한 번씩 농산물 도매시장으로 과일을 사러 간다. 긴 여름 장마로 모든 과일값이 쑥 올랐고 코로나로 밖에 나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내내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했다. 포도 가격이 3만 2천이었고 옆에 샤인 머스캣 세송이가 3만 8천 원이었다. 에엣? 가격만 물었지 전혀 살 생각이 없었는데 옆에 봉여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내게 말했다.

우리도 이런 거 함 묵어보자. 한 번은 묵어봐야지

봉여사 속삭임도 틀린게 없었다. 니까진게 뭐라고.

역시 봉여사랑 나랑은 손발이 잘 맞거든. 샤인 머스캣과 토마토 한 상자를 사며 5만 7천 원을 결재했다.


그날 샤인 머스캣을 먹으며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다.

겁도 없이 한송이에 12,600원, 한알에 250이나 하는 걸 샀다고 착한 늑대가 싫은 내색을 했다. 그냥 말로만 하면 될 것을 샤인 머스캣 송이를 한 알 한 알 세어서  한송이 12,600원에서 한알 단가를  산출해 냈다. 샤인 머스캣 한알에 250원이었다. 입에 넣을 때마다 500원 , 1500원.... 겁도 없이 이런 비싼 걸 샀다고 내내 투덜거렸다.


쫌생이, 말미잘, 개미 똥구멍, 낙타 이빨에 낀 고춧가루, 개구리 발차기... 이렇게 속으로 욕을 해가며 참고 있는데, 계속 잔소리를 해댔다. 이게 뭐가 맛있다고, 하여튼 뭐 좀 유행한다고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덩달아 난리거든. 청포도랑 비슷하구먼... 어쩌고 저쩌고.. 궁시랑 꽁시랑 땡시랑...


그만 좀 하라고!

내가 돈 줄게. 샤인 머스캣 값 내가 준다고!


빽, 고함을 질렀다. 뭐 이런 것 가지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냐. 이왕 사 온 거 맛있게 먹으면 안 되나? 나도 돈버는데 이따위 샤인 머스캣 하나도 못 사 먹냐!! 철딱서니가 없다. 생활비 70만 원이 더 들어갔다고 이야기했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한 판 붙을 기세가 되자 샤인 머스캣을 빠른 속도로 다 먹은 세 녀석은 날랜 고양이처럼 각자의 방으로 후르룩 흩어졌다. 설거지를 하다가 고무장갑을 탁 벗어던지고 휴대폰으로 바로 송금 5만 원을 눌렀다.

이제 내가 산 거니까 말하라지 말라고!

시끌벅적하던 공간에 갑자기 모든 분주함들이 사라졌다. 샤인 머스캣의 달콤함이 온데간데없이 같이 사라졌다.


샤인 머스캣, 너는 왜 나를 유혹하니?

두 번째 송이는 남편이 없을 때 먹었다. 내 돈 내산이니까. 맛없다는 사람은 안 줄 거야. 원래 내가 뒤끝이 좀 숭악하거든(흉악하다의 사투리) 세 번째 송이는 모두들 같이 먹었다. 착한 늑대가 한알 한알 넣을 때마다 내가 세었다. 500원, 2000원. 3500원. 돈 내놔. 내가 뒤끝이 좀 많이 사악하거든.


사는 것도 달콤했으믄

샤인 머스캣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며 여지없이 나와 착한 늑대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욕적이면서도 반대로 일단 쓰고 보는 계산이 없는 나, 미니멀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계산은 많이 하는 남편, 21살에 만나 6년을 연애하고 결혼한지 25년, 여전히 이런 걸로 싸운다. 먹는 걸로 태클 걸지 마. 비참해져.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깊은 감정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책을 집어 든다. 노동에 저당 잡힌 나날을 살건만 돈이 주는 즐거움은 어디로 싸-악 사라졌는지, 진짜 흉악하고 사악한 것은 이 놈의 돈이란 녀석이다. 머니, 너 대체 뭐니? 눈이 달려 있음 나한테로 좀 팍 안겨봐라. 돈의 기쁨과 슬픔을 샤인머캣이 한꺼번에 몰고왔다.


며칠 후 이 이야기를 아는 동생에게 했더니 동생이 샤인 머스캣 한 박스를 선물해 줬다. 아주 고맙고 감사하고, 같은 가격보다 3배는 많았다. 샤인 머스캣 먹자고 고함지르면 각 방에 흩어져 있던 녀석들과 착한 늑대가 우르르 몰려온다. 맛있긴 하네. 당신 먹은 거 총 15개, 250원 곱하기해서 내놔. 착한 늑대는 허허 웃기만 한다.


물욕적인 아줌마, 좀 덜 쓰고 (Consumption) 살자.

싫은데. 나 더 쓰고 (write) 잘 거야. 먼저 자.

신나게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다. 근처 함안 왕포도 농장에 샤인 머스캣을 시중보다 훨씬 싸게 팔아서 또 한 박스를 사 먹었다. 올해 마지막 송이를 땄다고 내년에 오라고 하신다.




사는 게 샤인 머스캣처럼 달콤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슬하고 갑갑하고 달콤했던 여름이 슬슬 꼬리를 감춘다. 달콤함을 선사해 준 여름, 남편의 지갑을 힘들게 한 여름, 잘 가라


#  Money is not the only answer, but it makes

a difference

돈이 유일한 답은 아니지만 돈이 차이를 만든다.

-버럭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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