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털이 보송하던 스물둘에 만나 서른에 결혼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벚꽃이 흩날리던 봄이었다.
지금까지 서른여섯 번의 봄 중에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봄이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는(라떼는ㅠ) 짧은 하의와 하이힐이 유행이었다.
우스개로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편한, 말 그대로 몸이 편한 대학생활을 하는 거라고. (라떼충ㅠ)
도대체 어떻게 저러고 다녔을까 싶은 짧은 치마와 하이힐을 장착하고 신나게 연애를 했다.
대학생활부터 지금까지 내 삶에는 항상 그가 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나는 하숙도 하고, 기숙사에도 살았다가, 자취도 했다.
매번 두 해를 채 못 넘기고 이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가 무거운 짐을 날라주느라 고생을 했다.
그러려니 하던 그가 언젠가 물었다.
"근데, 왜 계속 이사를 하는 거야?"
때마다 대는 이유는 있었지만 그 이유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가 너무 지루해 이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떤 일이고 금방 싫증을 느끼는 내가 한 사람과 10년 가까운 연애를 하고, 지금 다니는 직장도 만 10년이 넘게 계속 다니는 중이라는 사실이 때때로 믿어지지 않는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다.
연애도 결혼생활도, 우리가 겪는 모든 현실의 문턱에서 즐겁기도 했지만 힘든 다툼도 많았다.
그래도 그는 피하지 않고 하나하나 성실하게 마주했다.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눈물로, 우리는 '사랑' 위에 '신뢰'를 쌓았다.
여느 젊은 부부들이 그렇듯 우리도 결혼을 준비하며, 집을 마련하며, 아이를 갖고 낳으면서 휘청휘청했다.
아무리 연애를 오래 했어도 서로 남자친구 여자친구로 오래 지냈던 것이지 남편과 아내는 처음이고 사위와 며느리도 처음이며 엄마와 아빠도 난생처음이었으니까.
쉽지 않았다.
어느덧 주말부부를 한 지 4년이 되었고, 나는 아등바등 주말을 기다리는 워킹맘으로 살았다.
휘청휘청은 했어도 나름대로 잘 버티면서 어느덧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다.
이제 우리 시간의 기준은 아이의 나이가 되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나는 직장생활 10년을 맞이했다.
아이는 어느 때보다 나를 필요로 했고, 나에게도 변화가 필요했다.
몇 해 전부터 생각해 온 해외 연수를 준비했다.
경쟁이 치열해 선발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팀은 연중에 조직개편이 되면서 새로 생긴 신생 팀이었다. 기존의 업무에 더해 새로 생긴 골치 아픈 일(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작은 팀 소속이었고, 10년 차여도 나이가 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 픽업 때문에 칼퇴가 필수인 애 엄마가 아닌가.
내가 챙길 수 있는 성과는 다 챙겨 모아보자고 마음 먹었고, 그렇게 했다.
그 해 말에 나는 해외교육연수 파견자로 선발되었다.
준비할 때부터 그에게 슬쩍 이야기는 해 두었었다. 예상은 했어도 생각보다 어둡게 변한 그의 표정 때문에 '쉽지 않은 도전이고 선발될 가능성도 낮다'는 사족을 덧붙였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되면. 되고 나서 고민하자. 아직 선발된 것도 아니니까.'라는 사족을 덧덧붙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말했다.
"선발될 거야. 어떻게든 되게 하겠지. 되고 나서 고민을 하면 무슨 소용이야. 되면 갈 거면서."
예상은 했지만 그는 많이 우울해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서운했다.
다른 직원들에게 해외연수 기회는 그야말로 가족 모두의 축하를 받는 직장생활 최고의 이벤트였다. 주로 남자 직원들 기준이기는 해도 가족에게 선물 같은 기회라고들 했다. 그런데 나는 아빠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미국으로 가버리는 이기적인 엄마가 된 꼴이다.
마음이 상하자 말도 막 나왔다.
"네게 그런 기회가 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찬성했을 거고 축하했을 거야. 아이를 못 보는 게 힘들면 어떻게 해서라도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거라고!"
현실적으로 그에게 무척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남편에게 딸아이는 보고 있기도 아까운 애틋한 존재다.
주말에만 만나는 딸아이가 아빠의 공백을 최대한 못 느끼게 하려고 아이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주말 아침이면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둘이 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해피밀을 먹고, 아이가 좋아하는 공주 뮤지컬을 보러 갔다. 아빠와 연을 날리고, 여름에는 수영하고 겨울에는 썰매 타며 아이는 아빠와 하는 시간은 항상 최고로 즐겁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 쌓아 올린 '공든 탑'인 것이다.
나는 1년을 눈 깜빡할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억겁의 시간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힘들어하는 그에게 제안했다. 일단, 같이 가자고.
출국 시기를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뒤로 미루고 그에게 '아빠 육아휴직'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단 칼에 '안된다'라고 했다.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요즘이 어느 때인데 아빠가 육아휴직을 아예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고 했지만, 그는 나에게 물정 모르는 소리 말라며 법적으로 가능하지만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스스로 사례가 되어야 할 상황이 바로 지금이다.
인생은 선택이다. 더 중요한 걸 선택해야 한다.
직장을 그만두라는 소리가 아니다. (절대 안 되지. 그만둔 달까 봐 겁나는 사람은 오히려 나다)
그만 둘 각오로, 되게 해 보자는 것이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도 마음이 움직였는지, 아니면 이미 벌어진 일 받아들이자 생각했는지 플랜을 짰다.
가기 전까지, 소위 '갈아 넣는'것이다. 정확한 계획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직장에서의 단단한 신뢰가 필요했다. 남편은 그 해에 간부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지방 파견)를 두 번이나 나갔고 승진도 한 상태였다.
아빠 육아휴직 기간은 보통 정부에서 지원하는 기간인 3개월을 많이들 하는데 그는 2개월로 타협했다. 나머지는 휴가를 모두 아꼈다가 최대한 붙이는 것으로 했다.
얼마 뒤, 우리 세 가족은 미국행 비행기에 '함께' 몸을 실었다.
함께 떠난다는 건 그에게도 나에게도 어렵게 얻은 '성취'였다.
우리의 결혼생활도 '2막'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14시간의 긴 비행이라 이것저것 하며 잘 버티던 아이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한다.
"어으~~~ 지겨워. 지루해 정말!"
나와 너무나 비슷하게 생긴 얼굴을 하고 나와 너무나 비슷한 말투로 지루하다는 말을 연거푸 내뱉는 아이를 보고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엄마가, 미국에선 정말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