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골프 레슨을 받았다.
별로 취미도 없는 골프인데 주변에 방문학자로 온 사람들은 다 레슨을 받으니 따라서 받았다. 한국 사람들은 누가 어디서 뭘 한다더라고 들으면 안 해보고는 못 배기는지 그렇게 다들 부지런히 따라 한다. 나도 그런 토종 한국 사람이다.
레슨을 받고도 재미가 붙질 않아 필드는 두 어 번 나간 게 다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 반친구 엄마와 수다를 떨다가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Why does every Korean women cover themselves with white clothes in fields? Is there any religious reason for that?"
이게 무슨 소린가.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갔다.
골프 칠 때 왜 하얀 옷으로 다 가리냐고? 잠시 멍하다가 갑자기 폭소가 터졌다.
무슨 소린고 하니 필드에 나가면 하얀 모자, 하얀 팔토시 등등으로 몸을 다 가린 여인네들을 보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다 한국 여인들이라는 것이다. 히잡을 쓰는 것처럼 무슨 종교적인 이유라도 있나 했는데 밖에서만 그러는 게 무엇 때문이냐고.
이곳에 온 지 오래됐거나, 눌러사는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지만 아직 한국인 패치가 떨어지지 않으면 하루종일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에 피부가 무진장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나도 여름에 와서 한동안은 선크림을 완벽하게 바르고 모자에 선글라스에 팔토시도 가지고 다녔더랬다. (지금은 거의 맨얼굴로도 다닌다.)
한국에서 필드에 나갈 때는 선크림이나 모자로도 모자라 자외선 차단 쿨패치로 눈밑부터 얼굴을 절대 사수하니까 말 다했다.
내 대답에 미국 엄마들은 놀라는 눈치다. 유별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자 다시 묻는다.
한국 마스크팩이 정말 그렇게 좋으냐고.
한국 마스크팩이 특별히 좋다기보다, 보통 마스크팩은 매일 저녁에 자기 전에 하는 게 좋다고들 하는데 매일매일 꾸준히 하면 무슨 제품을 쓰든 피부가 좋아지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더 놀란다.
"What? Every single day???"
차라리 마스크팩을 황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덜 놀랍겠단다.
그다음 만날 때 한국 마스크팩을 선물하니 엄마들이 정말 좋아했다
아시안이 잘 보이지 않는 동네인데 어쩌다 중국, 일본 엄마들과 함께 섞일 때에도 꼭 한국인들 피부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한국 코스메틱 관련된 이야기는 빠지지 않으니 K-뷰티가 정말 위상이 높기는 한가 보다.
우리 동네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애틀랜타 한인타운 쪽에는 학군 좋다는 지역에 한국인들이 정말 많이 살고 있는데 한인타운에 위치한 한인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근처 한국식 카페에 들르곤 한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높은 천고, 넓은 실내공간, 깔끔한 인테리어, 맛있는 커피와 다양한 베이커리. 크~ 카페는 또 K-카페가 진리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정말 여기가 미국인가 싶게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데 그 동네를 가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뭐라도 발라야 하나, 신발이 이게 오늘 옷에 어울리나 싶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점검하게 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 친구 엄마들도 그렇다고 하니 그곳은 정말 '작은 한국'인가 보다.
플레이 데이트를 하고 간식거리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 계산을 하는데 미국 엄마가 나를 보고 웃는다.
"We have plenty of time right? Take your time Emma~~!"
보통은 self-checkout을 하는데 오늘은 줄이 길어서 점원이 계산을 해주는 곳에 줄을 섰더니 내 뒤에 줄이 긴 것도 신경이 쓰이고 아이가 계산 전에 꾸물꾸물 거리는 것에도 마음이 바빠서 또 '빨리빨리 병'이 도졌었나 보다. 내가 빨리빨리 하는 만큼 티는 안내도 앞에서 누가 꾸물꾸물거리면 아직도 복장이 살짝 뒤집어지기는 한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가는 한인마트에선 그럴 일이 없다.
나만큼 성격 급한 엄마들이 아이에게 낮은 목소리 강한 어조로 그만! 빨리! 를 외치며 터프하게 카트를 착착 몰며 고효율로 장을 본다. 점원들도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탁탁 간결하게 일처리를 한다. 가끔 회원가입이나 포인트 적립 문제로 살짝 지연될라 치면 정확한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고 고객센터로 연결, 어디서 하나 지체되는 단계가 없다.
그렇다면 미국은?
동네에 꽤나 크고 쾌적한 대형마트에 가면 계산대 하나에 점원 둘이 서서 한 명을 계산을, 한 명은 봉지에 물건을 담아 주는데 "How are you?"로 시작하는 스몰토크 한 번 해주고, 아이 귀엽다고 칭찬 한 번 하고 스티커 줄까? 묻고. 뭐 친절해서 기분도 좋고 나쁘지 않다. 그런데 가끔 계산을 틀리거나, 틀렸다고 하면 정정하는데 또 한 세월이 걸리곤 한다. 그리고 가끔 "도네이션 할래?" 묻는 것도 다른 점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것들을 많이 느끼게 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고단한가.
밤에 자려고 누우면 어깨가 꾹꾹 아프고 쑤신 것이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하고 아침 요가 수업이라도 들어야겠다고 했더니 미국엄마가 처방전을 내려준다.
"여기 엄마들처럼 살아봐 그냥"
좀 천천히 해도 되고, 남들(아이 포함) 신경도 덜 쓰고, 뭐 하나 거르는 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그래도 인생이 나름대로 잘 굴러간다고 말이다.
"이거보다 더 대충?"
내 대답에 너는 안될 놈이라는 듯이 그 친구가 웃는다.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살면서 보낸 일상을 생각하면 지금은 아주 몸도 마음도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눈에 비친 나는 여유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나 보다.
한국여자, 한국맘 DNA야 어쩌겠냐만 이곳에서만이라도 나도 태어나길 여유롭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듯이 한 번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