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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마모리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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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주 Apr 06. 2021

오이

초록색의 테두리


  "굶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라."

  아빠가 한 번, 엄마가 한 번 말한다. 본가에 있는 내내 먹기만 하고도 밥 얘기로 작별을 한다.

 

  조수석에 앉은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투정부린다. 정작 친정을 떠나는 내 마음은 후련한 가운데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 씨앗처럼 박혀있다.


  시골에서 적적하게 지내시는 부모님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본가에서 자고 오는데, 가끔은 오로지 의무감만으로 다녀오기도 한다.


  내 살림살이가 있는 우리집이 더 편한 것은 당연하고, 몸에 좋다며 쉬지 않고 뭔가를 먹이는 엄마 탓에 내내 속이 더부룩하다. 잔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빨간 신호등에 잠시 멈춰 몇 킬로 더 가면 보지 못할 동해바다를 보는데, 왼쪽 차선에 오이를 실은 차가 나란히 멈춰있다. 몇 천개는 돼보이는 오이들.


  평생 먹을 오이를 한꺼번에 보다니. 하얀 골판지 속에 누워 있을 오이를 생각하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오이'

  지 생김새처럼 동글하고 기다란 이름이다. 겉도 초록, 속도 초록. 나는 아주 잠시 눈을 감고 오이로 변신해본다.


  신호등에 오잇빛이 번질 때, 오이가 먼저 마트로 갔다. 내가 한 시간 뒤에 집 앞 마트에 도착했을 때 오이는 오이처럼 누워있었다. 가지런히 누운 채 운명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5개 3500원 하는 오이 대신 2개 2000원 하는 오이를 산다. 냉장고 속에서 먹고 남은 오이가 비틀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엄마가 싸준 과일과 생선을 정리하고 간단히 저녁을 먹여 아이를 재운다.


  한밤에 싱크대 선반에 패드를 올려놓고, 유튜브 보며 오이를 자른다. 머리와 발목을 댕강 썰었을 때 오이는 청량한 풀냄새로 고함을 지른다.


  오이의 연두빛 피가 패드에 몇 방울 튈 때, 나는 불현듯 엄마, 아빠가 보고싶다.


  우리가 두 개씩 소포장된 오이가 아니라, 다섯 대 한 묶음인 오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얼마나 나빴을까.


  어떤 세상은 엄마와 아빠를 한 쌍으로 구매해 오이지로 말려놓았고, 다른 세상은 나와 아이의 가녀린 몸에 칼집을 내었다.


  우리는 각자의 세상에서 꼬들꼬들하게, 또 아삭아삭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이처럼 초록색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가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내 인생에 너무 많은 고춧가루를 뿌려놓고, 딸 걱정으로 더욱 말라가는 오이지 엄마를 생각하면 비린 죄책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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