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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a솨 Nov 03. 2019

좀 더 무디고 둥글둥글하게

북한산 그늘 아랫집


 어렸을 때부터 난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달고 살았다. 워낙 예민하고 감정이 섬세한 데다가 생각도 많아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민들을 마음속에 가둬 둔 때가 참 많았다. 특히나 타인에게 뾰족하게 들릴만한 그런 생각들은 더더욱 꺼내질 못했고, 내가 생각하는 만큼 왜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섬세하게 생각하지 못할까. 이해가 아닌 미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괴로워했다. 내가 좀 너그러워지면 되는 건데 난 늘 예민했고, 이런 나의 예민함은 대부분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나타났다.


  특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이 증상이 찾아오곤 했다. 처음에는 뒷골이 저릿하고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오다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그다음엔 화장실을 들락날락해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 복통이 시작되고, 마른 헛구역질이 나오다가 구토를 한다. 이때부터는 방전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링겔이라도 좀 맞으면서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밖에 나질 않는다. 덕분에 난 심할 땐 한 달에 한 번, 그나마 양호할 땐 세 달에 한 번 꼴로 응급실에 가야만 했다.



 그래도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요즘은 좀 달라졌다. 나도 연륜이란 게 좀 쌓인 건지. 예전만큼 스트레스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다 보니까 응급실을 가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난 타고 나기를 예민하고 섬세하게 태어나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보금자리가 아직까지 낯선 탓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난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당당함이 한풀 꺾인 탓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스트레스와 새로운 증상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름하여 과민성 안전 증후군.




 실제로 북한산 그늘 아랫집에 살면서 나의 안전을 특유의 예민함으로 바라보니, 불안한 마음이 들고 걱정되는 요소들이 이곳저곳에 많이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 집은 생각보다 지하철 역과 거리가 좀 멀었고. 골목이 중간중간 어두운 탓에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기에 적합하지 못했다. 언젠가 퇴근을 늦게 하고 집에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큰길인데도 괜히 무서운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오면 이걸로 때려버리겠다는 다짐으로 한 손에 쥔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걸음걸음마다 힘을 주었다. 평소에는 존재 자체도 몰랐던 도보 위 '여성안심귀갓길'이라는 글자도 오히려 안심보다는 불안하게 느껴지는 요소였다. 이 길이 얼마나 안심한 길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큼지막하게 안심한 귀갓길이라고 떡하니 적어놓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어두운 골목길뿐만이 아니다. 북한산 그늘 아랫집은 벌레로부터도 안전하지 못한 집이었다. 어디서 자꾸 나타나는 건지. 난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자연에서 뛰고 나뒹굴며 지낸탓인지 웬만한 벌레로는 꺅꺅 놀라지도 않고, 작은 생명을 살생하지 못해서 벌벌 떨 만큼 가녀린 구석은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집으로 이사 온, 그 해 여름날. 우연히 마주친 바퀴벌레는 정말 소름 돋는 용모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잘 먹고 살아왔는지 몸통이 적어도 성인 남자의 엄지손가락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사슴 벌래도 아니고. 이렇게 큰 바퀴벌레는 시골에서도 본 적이 없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바람에 나의 잃어버린 가녀림을 되찾을 정도였다. 어떤 날에는 콩같이 생긴 애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다리 많은 애가 나타나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제는 하다못해 초파리와 모기까지. 다양한 불청객 놈들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며 지내고 싶은 내 공간에 수시로 침범해 불편함과 짜증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벌레를 박멸할 수 있는 방법은 비교적 정확하게 있는 편이다. 방역업체를 부르거나 퇴치제를 온 집안에 도배하듯이 발라놓고 뿌려놓으면 그런대로 괜찮아지곤 했으니까.



 그런데 불면증 만큼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이게 어렸을 때 습관이란 게 되게 중요하다고 느끼는 게. 나는 항상 집에서 혼자 자야 할 때마다 집안의 문이란 문은 다 닫고 걸어 잠가야 했고, 침대 위에 누어서도 내 주변을 베개나 인형이 에워싸며 보호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야 그나마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이불 밖으로 발이 삐져나가서도 안됐다. 귀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왠지 혼자 자는 날에는 없던 귀신도 갑자기 나타나서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내 발목을 붙잡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집에서 혼자 잘 때마다 외부로부터 누군가 우리 집에 침입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느끼곤 하는데,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불면증은 다음날 내 생활에 불편함을 주는 경우가 참 많았다. 이것도 어찌 보면 내가 예민한데 우리 집이 혼자 살기에 너무 큰 탓이다.



 북한산 그늘 아랫집은 넓은 침실과 옷방으로 쓰고 있는 작은방, 4인용 식탁을 놓아도 널찍한 거실 겸 부엌, 화장실 그리고 세탁기 겸 창고로 쓰이는 공간이 있는 아주 널찍한 집이다. 지금은 적응이 좀 되긴 했지만, 처음에 이사 와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고 하는데 예전 같았으면 우리 집 크기가 딱 여기 침실만 한 크기였을텐데. 이 공간 말고도 다른 공간들이 옆에 더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신경 써서 잠그고 닫아야 할 문의 개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문을 닫고 걸어 잠근 뒤 인형이나 베개로 내 주변을 보호하면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이런 것들이 내가 잠을 자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닌 것 같다. 가끔 피곤한 날에는 흐트러진 상태로 아침까지 곯아떨어지는 날도 많았으니까. 다만,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비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날에는 아직도 좀 어렵다. 바깥에서 들리는 잡음과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에 괜스레 내가 더 민감 해 져서, 뒤척이는 새벽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태생이 예민 덩어리다. 그냥 좀 무디고 둥글둥글했으면 싶은데 그러질 못한다. 나도 참 바보 같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내가 이런 애란 걸 잘 알고 있었으면, 북한산 그늘 아랫집을 선택할 때,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내가 과민성 안전 증후군을 느낄만한 요소들에 대해 좀 더 꼼꼼하게 따져봤어야 했는데. 아쉽다. 근데 어쩔 수 없다. 이왕 사는 거 앞으로는 내가, 좀 더 무디고 둥글둥글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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