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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아 SSunalife Jan 02. 2022

관계와 성장

브런치북을 시작하며

브런치를 2021년 11월 15일에 시작해서 얼추 지난 두 달 동안 내 주변과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목적이 내 이야기를 함으로써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쓸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타이밍에 브런치 작가이신 지인 한 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 글을 촘촘히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시던 그분께서 올해는 내가 브런치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하길 바란다는 새해 덕담을 해주셨다. 그리고 내 글에서 이민자들이 겪는 특히 부모 자식의 관계와 성장에 대한 글을 자주 읽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말씀하셨고 그분의 기대는 내게 따뜻한 영감(inspiration)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부모 자식의 관계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다. 친구야 마음에 안 들면 안 보면 그만이고 심지어 부부도 정 싫으면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하늘이 맺어준 천륜이라는 부모 자식의 혈연관계는 한쪽이 뒤돌아 선다고 남남이 되는 관계가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밥만 준다고 자식이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성인으로 쑥쑥 저절로 성장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모가 자식이라는 짐을 평생 짊어지고 가는 관계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농사 중에서 자식 농사가 가장 어렵다'라고 하겠는가. 부모가 아무리 공을 들여도 자식이라는 농사는 부모 뜻대로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린 자식을 둔 부모가 '나는 내 자식을 이렇게 키웠노라' 하면 자식들의 성공을 바라는 많은 어머니들은 다른 사람의 성공의 사례에서 자식 키우는 정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자식이란 농사는   농사를 지어 어느 시점에 수확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까다로운 관계를 끊임없이 이해하고 성찰하며 노력해야 하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ongoing journey)이다. 좋은 대학을 갔다 해서 자식 농사가 끝난 것도 아니고 좋은 직장을 들어갔다 해서 부모의 역할이 끝난 것도 아니다.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고 자식을 완전히 잊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모 자식만큼이나 끈끈하고 여정이 긴 관계도 없는 것 같다.


나의 지인은 내게 자식을 어떻게 잘 키울 수 있나 하는 해답을 제시하는 그런 글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 어떻게 함께 아파가고 충돌하면서 성장해가는지 살아 꿈틀거리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셨다. 내 두 아이들이 뭐 크게 성공한 아이들도 아니고 특출 난 것도 아니어서 해답은 모르지만 내가 이민자라는 울타리 내에서 두 아이들을 키우며 아파하고 가슴 조였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누다 보면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그 누구에겐가 도움이 혹은 위안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22년 새해 첫 출발을 관계와 성장(부모와 자식 관계 중심으로)이라는 설렘과 기대의 금빛 단추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나는 1996년 5월 2일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왔다. 5월 2일은 남편과 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 남편과 나는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할 기념일들이 많을 터이니 기왕이면 기억하기 쉽게 결혼기념일과 같은 날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새로운 출발과 이민이라는 또 다른 출발을 같은 날로 정했다.


이민을 왔던 그때 나는 만 2살 된 딸아이가 있었고 5개월 된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한국도 먹고살만한데 왜 이민을 가느냐고 의아해했다. 사실 나는 그때 이민을 가야 하는 특별한 동기가 없었다. 남편이 이민을 가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고 그 사람을 따라서 별 준비도 없이 그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캐나다 밴쿠버라는 곳을 오게 되었다.


우리가 이민을 왔을 때 자주 듣던 얘기 중 하나가 이민 사회에서는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속이는 경우가 많으니 한국 사람을 멀리 하고 살면 절반은 성공한 이민생활이 된다는 웃지 못할 얘기를 공공연히들 했다. 우리는 특별히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정착 서비스를 대행해 준 곳에서 오늘날 비씨주(British Columbia)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코퀴틀람(Coquitlam)이라는 곳에 아파트를 얻어놓았다. 그때만 해도 이곳에는 작은 한인 마트가 한두 개 있었고 길을 걷다 한국말이 뒤에서 들리면 뒤돌아서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세요"라며 인사를 서로 나눌 정도로 한인 숫자가 많지 않았다. 우리가 이민 온 그 다음 해에 한국에서는 IMF가 터졌다. IMF로 인해 밴쿠버에 사는 한인들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다수의 한인들은 유학원, 홈스테이, 여행사 등 한국 유학생이나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말에 한인 성당을 뜨문뜨문 나가는 일 이외에는 한인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에는 준(June Harris)이라는 백인 할머니가 아파트 매니저로 있었다. 준은 새로 이민 온 우리 가족에게 아주 친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치 친정어머니처럼 나를 살갑게 대해주셨다. 영어를 모르는 나의 딸아이에게 영어로 말을 시키고 딸아이가 좋아할 법한 비디오와 장난감도 수시로 선물해 주셨다. 비행기 내에서 한국 애국가를 부르던 두 살 된 나의 딸아이는 준 할머니가 주신 비디오를 통해서 처음으로 영어를 듣고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준 할머니가 주신 비디오들 중에서 딸아이는 Alvin and Chipmonks라는 다람쥐 삼총사 비디오를 가장 좋아했다. 그 삼총사 중에서 앨빈(Alvin)이라는 이름의 막내 다람쥐가 제일 재치가 있었는데 딸아이는 그 다람쥐를 제일 좋아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우리 아들의 이름을 딸아이가 좋아하는 앨빈으로 지어줬다.


그 해 10월 뱃속에 있던 아들은 앨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제 우리는 넷이 되었다. 엄마, 아빠, 딸 그리고 아들. 드넓은 캐나다에 가족이라고는 딱 넷뿐이다. 아니 넷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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