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도 막상 크고 작은 일들을 대하는 그 순간에는 호들갑을 떨기 십상이다. 특히나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캐나다 비씨(BC) 주에서는 만 5세가 되면 킨더가든(Kindergarten)이라는 공교육이 시작된다. 캐나다에서는 부부가 둘 다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많은 아이들은 킨더가든을 들어가기 전에 데이케어나 프리스쿨을 통해서 또래 문화를 경험한다. 일종의 한국의 놀이방이나 유치원 같은 곳이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와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한국말만 사용했다. 그런데 앞집 부부에게 우리 딸보다 한 살 위인 캐빈이라는 귀여운 아들이 있었다. 그 집 아들과 우리 아이들은 자주 어울리며 친하게 지냈다. 내 딸아이는 세 번째 생일을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맞이하게 되었다.
캐빈은 오전에는 프리스쿨을 갔다 오고 오후에는 우리 집 아이들과 어울리곤 했다. 우리 부부도 딸아이가 당장 킨더가든을 가면 영어 알파벳도 모르고 집단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어려울 수 있으니 네 살이 되면 딸아이를 프리스쿨에 보내기로 했다.
프리스쿨 첫날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딸아이는 울고 불고 수업 내내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울기만 했단다.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아빠도 차 안에서 울고 꼭 이렇게 까지 해서 아이를 보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난 후 부녀는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또 울었다고 한다. 딸아이는 그날 그렇게 프리스쿨이라는 또래 집단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지나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 있었던 얘기들을 남편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내 딸아이가 잘 적응해 가고 있다고 믿었다. 우리 부부는 딸아이가 프리스쿨에서 그리거나 만들어온 것들을 보고 기뻐했고 남편은 시간이 날 때마다 두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림책들을 빌려오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프리스쿨을 다니며 그렇게 조금씩 여물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따르릉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딸아이의 프리스쿨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딸아이를 아빠가 데려다주고 데려오니 엄마를 자주 못 봐서 나랑 대화를 하고 싶었단다. 서로 간의 인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본인이 아이들을 가르친 지 십 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인의 많은 경험과는 다르게 내 딸아이가 동그라미, 세모 그리고 네모를 못 그린다는 것이다. 시작만 하고 끝을 못 맺는다고 했다. 다시 처음 지점에서 만나야 그림이 완성되는데 내 딸은 그걸 못한다고 했다. 처음 배워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여러 주가 지나도 끝을 맺는 것을 못한다는 것이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내 딸아이가 보통의 아이들보다 발달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으로 내겐 들렸다. 그리고 그 선생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worried, concerned” 한국말로 걱정이 된다 이런 표현을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마다 발달 과정이 다르니 시간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며 나를 애써 위로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집에서도 같이 노력해 보자고 했다. 한번 도형들을 엄마와 같이 그려보면 어떻겠냐고도 했다. 너무 큰 걱정을 말라했지만 어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었겠는가. 안 그러면 선생님이 구태여 전화까지 해서 내게 그런 정황을 알렸겠는가…
무언가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때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왔다. 나는 일단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았다. 내 공부한다고 아이들의 많은 부분을 남편에게 맡기고 있기 때문에 자칫 남편에게 딸아이의 발달 과정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면 나보다 더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내가 딸아이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세모 네모 동그라미를 오랫동안 잘 못 그린다고 솔직히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데 그때는 수많이 걱정들이 앞섰다.
그날 밤 나는 아무도 몰래 울다가 잠이 들었다. 혹시라도 딸아이가 진짜 어디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왜 사랑에 눈이 멀어 준비도 안된 채 어른이 되었는가? 나는 왜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가? 답답하고 불안하고 외로웠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나는 나의 딸아이와 같이 도형도 그리고, 그림도 그리고, 그림책도 같이 보는 아름다운 모녀간의 동행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후 프리스쿨 선생님은 딸아이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딸아이는 그렇게 보통의 아이로 성장해갔다. 그리고 다섯 살이 되어 아무 문제없이 킨더가든에 입학하였다.
나는 대학원 수업이 없는 날은 딸아이의 학교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곤 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스낵 나누어주는 일들을 거들었다. 하루는 학교 복도에 서 있는데 한 학부모가 내게 와서 물었다. 어떻게 딸아이를 가르치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가르치는 것이 없다고 하자 내 딸아이가 이미 초등학교 3-4학년 수준이 넘는 책을 보고 있는데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때 내 딸아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솔직히 몰랐다.
세모 네모도 제대로 못 그려 나를 놀라게 했던 때가 바로 일 년 전이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읽는지는 모르겠으나 딸아이는 놀라운 속도로 글을 읽어가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면 딸아이가 동생에게 얘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읽었던 책 내용이 그 아이의 머릿속에 있고 그것을 마치 책을 읽듯이 동생에게 전달해주곤 했다. 혹시 이 아이가 ‘천재’인가? 하는 설렘과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다. 딸아이는 문자 중독증에 가까울 정도로 글씨만 보면 읽으려고 했다. 모르면 묻고 알면 그 뜻까지 알고 싶어 했다. 어디를 가든 질문이 너무 많아서 대답하기에 지칠 때도 많았다. 남의 집 자식 얘기 같으면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 인내하며 대답해주라고 하겠지만 바쁜 내게 딸아이는 어지간히 귀찮은 아이였다.
그런 딸아이가 초등학교 내내 특별하게 친한 친구는 없었지만 별 무리 없이 학교생활을 해나갔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수학도 잘하며, 초등학생이 담아내기엔 어려운 단어들과 생각들로 선생님들 놀라게 하기도 했고 영재교육 프로그램(gifted program)에 들어가 다양한 프로그램 참여하기도 하며 초등학교를 생각보다 훨씬 더 잘 해내고 마쳤다. 지금도 나는 가끔 딸아이에게 “어쭈 세모 네모도 못 그리던 놈 많이 컸네”라고 놀린다. 그럴 때마다 딸아이는 그 말 좀 그만하라고 한다 ㅎㅎㅎ.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프리스쿨 선생님은 내 남편이 영어가 자유롭지 못하니 엄마인 나와 통화하면서 프리스쿨에서는 요새 이런 것들을 하고 있는데 내 딸아이가 그런 것들은 잘 못한다. 그러니 집에서도 한 번 같이 노력해보자 뭐 그런 정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학습 상황을 전달하는 성의를 보여줬는데 나는 그날 밤 혹시라도 내 아이가 어딘가 부족한 아이는 아닌가 하는 불필요하게 수많은 생각과 근심들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일일이 다 가슴 조이지 않아도 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때가 되면 크고 여물어갔다. 그러나 나는 딸아이가 성장하는 내내 초보 엄마로서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둘째인 아들을 키울 때는 말 그대로 “네 마음대로 하세요” 하며 내버려 두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천재도 바보도 아닌 그 중간쯤 어디쯤에서 보통의 아이로 성장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가만 두어도 아들 녀석은 보통의 아이로 잘 성장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는 냉탕과 온탕 사이를 하루에도 여러 번 초특급 열차를 타고 질주할 때가 많다. 초보 엄마에게 아이들은 천재 아니면 바보가 된다. 내 아이가 조금만 잘해도 혹시 천재 인가하고 조금만 못해도 혹시 뭐가 문제가 있나 하고 너무 많은 걱정과 근심을 한다. 길고 긴 삶의 여정 속에 자식이라는 기차는 남보다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보챌 필요도 없고 보챈다고 안 될 아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가만 둔다 해서 될 아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