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일이 점점 더 좋아진다.
태풍 <카눈>, 속도는 느리고, 위력은 크고, 대한민국을 관통한다기에 많이 긴장했다.
제주는 9일(수요일) 아침 오락가락 비가 오기 시작했다. 순간 몰아치는 비를 보고 지레 겁먹고, 미술수업도 취소하고, 산책도 포기했다.
비를 맞는데 큰 거부감은 없지만, 비와 바람을 동시에 맞는 건 일부러 비 맞을 각오를 하고 즐겨야 하는 일이다.
목요일까지 많은 비바람이 예상된다고 했으나, 태풍 카눈은 제주 북부에 사는 우리에게는 아무 위력 없이 지나갔다.
태풍이 지나간 후 인스타나, 맘카페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동쪽에는 태풍의 상흔이 남았나 보다. 큰 탈없이 지나가서 다행이다.
동서남북 날씨가 다른 제주날씨에 늘 신기함을 느낀다.
영향력은 약했으나 지나간 태풍 카눈 덕분에 목요일은 매우 맑고 상쾌하고 시원했다.
걷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그냥 가을이 와도 좋겠다
는 생각을 해봤다.
일몰을 한 시간 앞두고 산책을 시작했다.
매일 걷는 길인데도, 그 며칠 사이에 풍경이 또 다르다.
8월의 뜨거운 햇볕에 열매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들아 미안하다. 이름도 모르고 매일 자라는 너의 꽃과 열매와 잎사귀 덕분에 나는 행복하단다.
나는 귤나무와 대추나무. 석류나무 밖에 모르겠다.
한 여름에도 아직 피어있는 능소화도 반갑고, 부쩍 꽃잎이 많아진다 싶더니 꽃씨 하나씩 안고 있는 분꽃도 반갑다.
분꽃이 분꽃이라는 걸 내가 언제 알았더라 생각하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꽃씨 모으기 캠페인이 있었다. 코 흘리는 꼬맹이들이 길가에 돌아다니면서
분꽃, 나팔꽃, 접시꽃, 봉숭아꽃 꽃씨 모으기를 했더랬다. 그래서 이 꽃들은 꽃씨를 보고도 꽃 이름을 맞출 수 있다. 노동력 착취라고 생각했는데, 일종의 체험학습이었구나.
아파트 단지에서 관리하는 화단의 밖으로 나온 애호박을 보고 똑 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요즘 채소값이 비싼 탓일까. 중년의 객기였을까.
화단에서는 안 보이고, 화단 밖에서 보이는 애호박이 장수할 수 있을지, 나 아닌 누군가가 또 노리는 타깃이 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길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꽤 많다)
요즘 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안부를 확인하는 동백열매도 한 개 있다.
보통 동백열매의 크기는 작은 미니사과나 탱자 정도의 크기인데, 이 동백은 어린아이 주먹만 해서 처음 발견했을 때, 육성으로 “엥? 이거 동백이야?! “ 소리를 냈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더 쳐다보고, 행여 지나치면 다시 돌아와서 존재를 확인하고, 지나간다. 아마 당분간은 동백열매와 함께 애호박의 안부도 궁금해질 예정이다.
이렇게 8월의 산책을 시작한 지 또 열흘 지났다.
올해는 걷다 시간을 보낼 것 같다.
걷는 일이 점점 더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