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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맘 Jun 16. 2024

포항 하늘에 세탁기를 던져 버렷!


이 파랗고 파란 눈부신 하늘을 보면서 과연 다음날의 내 마음에 흙비가 내릴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참 여행 중에 별일이 다 있다.

포항 호미곶 손을 보러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동 ○○○호죠?”

“네,”

“지금 댁 세탁실에 물난리 났어요.” 

세탁실에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어젯밤부터 들려서 아직도 들린다고 아랫집에서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네? 설마 보이스피싱은 아니겠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어제 그제까지만 해도 정말 추운 날씨 탓에 세탁기로 들어가는 호스의 물이 얼었다. 드라이기로 따순 바람을 불어주었지만 잘 되질 않았고 나도 모르게 세탁기 수도꼭지에 연결하는 캡을 좀 풀어놨다. 그런데 하필 우리가 포항여행을 시작한 그날부터 날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꽉 조이지 않은 그 틈으로 물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포항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 날아갈 수도 없고 발을 동동 굴렀다. 호미곶에 도착했지만, 앞에 보이는 손이 알리딘 램프의 지니 손이라면, 저 손을 타고 우리 집에 슝 날아가 세탁기 물을 1초라도 빨리 잠그고 싶었다.

관리실 직원에게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잠가 달라고 했다. 우리 집에 훔쳐 갈 것도 없으니 크게 걱정은 안 되는데 오히려 베란다 상황이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2023년 1월 신문의 한 기사

“수도 요금 650만 원 폭탄... 세탁기 호스 빠져 온수 1천 톤 샜다.”

대구의 아파트 한 가구에서 수도와 세탁기를 연결한 온수 호스가 빠진 지 모르고 장기간 집을 비웠다가 1100톤의 물이 버려졌고 수도요금이 650만 원이 나왔다는 사상 초유의 폭탄 기사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의하고 또 조심하라는 하늘의 경고가 또 한 번 날아온 듯했다. 여행 전엔 반드시 세탁기 연결 호스는 꼭 다시 한번 점검하고 떠나자!     

나의 머릿속은 온통 세탁기로 빙빙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내내 울상을 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수도는 이미 잠갔으니 요금 폭탄의 성적표만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다행히 나는 세탁할 때 온수는 쓰지 않았다). 잊고 즐기기로 했다. 잊기 위해서 버스 타고 호미곶 가는 길에 어제 찍은 곤륜산 사진을 연우와 함께 다시 봤다.

너무 좋아서 춤이 절로 나왔던 곳. 연우도 나도 땅바닥에 뒹굴뒹굴 굴러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안 봤다. 다들 서로를 신경 쓰지 않고 뒹굴고 뛰고 점프하고 난리였기 때문이다. 사진 찍기에 바쁜 곳이다. 요들송이 절로 나올 곳이었다.     

곤륜산 정상의 넓은 평지에 인조잔디가 깔려 있고 패러글라이딩을 타기도 하는 곳이었다. 걸어서 정상까지는 약 20분 정도 소요가 된다. 곤륜산은 포항의 핫플레이스로 정상에서 보이는 탁 트인 경치를 배경으로 인생 샷을 남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곳이다. 올라가는 진입로는 경사가 급하고 길은 상당히 가팔랐다.   앞에 가는 커플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밀어주고 당겨주고 알콩달콩 가고 있었는데 딸과 나는 그때 티격태격한 상태여서 말없이 묵묵히 올라만 갔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간 순간, 싸움 끝! 우리는 더덩실 춤추며 서로 부둥켜안고 잔디밭에 뒹굴었다. 마치 커플처럼.

싸운 커플은 포항의 곤륜산으로! 이 곤륜산 하나로 포항여행은 대성공이었다. 세탁기만 빼면.

패러글라이딩을 타보진 않았어도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곤륜산에서의 하늘은 하늘 그 자체! 바다와 하늘의 하모니가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저곳은 바다, 바로 위는 하늘, 우리가 앉아있는 이곳은 초록 잔디. 초록색과 파란색이 이렇게 잘 어울린다는 걸 여기서 알았다.

연우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우리 이제 싸우지 말고 앞으로 남은 포항여행 잘하자 할 때쯤 바람이 휙 불어와 내 마스크가 저기 산 아래로 뒹굴뒹굴 굴러갔다. 그런데 또 연우는 그 마스크 구하러 가겠다고 바람에 날리는 하얀 마스크 주우러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웃고 우리는 또 웃었다. 포항 하늘이 우리를 향해 잘 왔다고 씨익 미소를 지어주는 것 같았다.      


세탁기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중간중간 짜증이 확 올라와서 딸이 힘들다고 투정하면 받아줄 법도 한데 그냥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연우는 한식이 먹고 싶고 나는 카페에 가서 커피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 다니기에는 우리의 시간이 아까웠다.

“연우야, 엄마랑 우리 여기에서 화해하고 커플 하자.”

“그래 자기!”

연우랑 여기 구룡포마을에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그 후의 이야기를 찍기로 했다. 주인공 싱글 맘 동백이가 씩씩하게 세상의 편견과 맞서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주변 마을 아낙네들의 안 좋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여자의 몸으로 술집 까멜리아를 운영한다. 그런 그녀에게 설레는 사랑이 찾아온다.

우리는 그렇게 동백이와 용식이가 되어 커플이 된 기념으로 스티커 사진도 찍고 팔짱을 끼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추억의 문구점에서 뽑기도 하고 불량식품도 몇 개 사서 서로의 입에 넣어도 줬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꽃핀 곳 까멜리아에서 커플 사진을 찍었다. 마음에 무척 들었다. 사랑해 자기!

우리가 연신 커플 놀이에 재미 들린 이곳은 역사의 아픈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구룡포마을은 <일본인 가옥 거리>로도 유명하다. 일본이 구룡포항을 만들고 일본어부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조선인들의 어업권을 수탈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식 가옥의 빈티지한 분위기가 이국적이고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조성이 되어있어서 역사는 모르고 드라마 촬영지를 보러 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 역사의 한 단면도 일깨워주는 장소였다.

돌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구룡포항은 삶의 체험 현장이었다. 고기잡이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그 위로 시골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합쳐져 점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우와 나는 말없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 돌계단에 앉아 바라봤다.


"부모와 자식 간의 우정이나 사랑만큼 큰 것은 없다.

- 헨리 워드 비처"


이렇게 우리는 세탁기를 잠시 까맣게 잊고 팔짱을 끼고 룰루랄라 다른 포항의 하늘로 날아갔다. 바로 스카이워크. 포항의 최첨단 하늘을 볼 수 있는 곳. 지점토로 만들어도 이렇게는 못 만들겠다. 구룡포의 10마리 용중 하늘로 못 올라간 용이 여기서 똬리를 틀었는지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여기를 올라가는 사람들은 더 대단했다. 우리도 질 수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빡 주고 한 걸음씩 올라갔다. 옆에 손잡이도 있고 뒤에 사람들도 많아서 굴러 떨어질 염려는 없을 것 같았는데 바람에 조금씩은 흔들리는 느낌에 없던 고소공포증도 생길 거 같아 포기하고 다시 살금살금 내려왔다. 연우가 내려오면서 한 말이

“다리가 세탁기에 들어가서 꼬불꼬불해진 거 같네.”

아! 세탁기를 잠시 잊고 있었다. 일깨워줘서 고마워. 자기!


그렇게 우리는 이튿날 세탁기를 온종일 마음과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그래도 무겁지만은 않았다. 여행 내내 포항의 파란 하늘이 나와 딸의 사이를 더 가까이 붙여주고 손을 다시 잡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여행은 명소에 가서 사진을 찍기 위한 여행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진과 여행 수첩을 살펴보면서 ‘와 우리 이때 많이 웃었네, 연우야.’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어디게 간 것보다, 맛있는 걸 먹은 것보다, 그 시간 그 장소에 딸과 내가 함께 걸었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만약 사진이 삭제되고 여행했던 것도 기억에서 점점 희미해지겠지만 여행한 만큼 우리 둘은 알게 모르게 더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포항의 시간과 하늘 아래 세탁기를 등에 메고 이곳저곳을 같이 날아다녔다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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