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사이로 지나가는 삶의 속도

조금은 버거운 계절의 리듬 속에서

by sunny


11월 15일.
올해가 아직 한 달 반이나 남았지만,

단풍이 절정을 지나 바닥에 소리 없이 깔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은 어느새 해의 끝자락에 가 닿는다.




사무실 근처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빨간 색, 노란 색, 갈색이 섞인 풍경이

지친 마음을 조용히 다독여준다. 점심시간에 잠깐이라도 밖으로 나가 걸으면,

나무들마다 자신만의 색을 자랑하는 듯 길 위에 가을빛을 흩뿌린다.




산책길에서 종종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노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겠지.

그 모습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느껴진다.

가을의 아름다움은 국적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마음 한 조각을 남기는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의 뚜렷한 사계절을 늘 좋아해왔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결, 그때마다 다르게 스며드는 감정의 온도.

변화가 빠른 만큼 늘 부지런해야 했지만,

그 부지런함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우리를 ‘빨리빨리 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어쩌면 이 계절의 구조 속에서 생겨난 본능 같은 것이다.

다음 계절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여름엔 홍수,

겨울엔 혹한을 피하기 어렵던 오랜 시간들.


자연보다 한 발 먼저 움직이며 살아야 했던 기억이 우리 민족성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은 솔직히 말해, 이 빠른 계절의 흐름이 조금 버겁다.

갱년기라는 고개를 넘고 있다 보니 예전 같지 않은 에너지가 금세 드러난다.




방 안에는 여름이 여전히 남아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옷걸이에는 반팔이 걸려 있고,

무더위를 함께 견디던 선풍기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방 한 구석에서 여전히 여름을 붙잡고 있다.

에어컨 필터 청소는 또 언제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나도 안다. 시험 준비를 핑계로 내가 많이 게을러졌다는 걸.


아침에는 친정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김장 하셨어요? 올해는 내가 시험 때문에 시간이 안 돼요.

일손 구해서 하세요. 제가 용돈 보내드릴게요.”




엄마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셨지만,

통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조용히 계좌로 용돈을 보냈다.

매년 11월 중순이면 친정집에 모여 세 집의 김장을 함께했다.


아버지가 농사지은 배추와 고춧가루로 양념을 버무리고,

언니와 내가 번갈아 가며 속을 넣고,

엄마는 김치를 다듬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

그 노동 속에 우리의 겨울이 준비되었고, 그 준비가 우리의 든든함이 되었다.


하지만 올해는 언니도 바쁘고,

나 역시 시험 준비로 시간을 내기 어려워 김치를 사먹기로 했다.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우던 연중행사도,

손끝의 묵직한 전통도 올해는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아쉽지만 상황에 맞는 선택이기도 하다.




계절은 늘 우리보다 먼저 움직인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며, 때때로 놓치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단풍이 떨어지기 전에 내 삶도 천천히 정리해보자 다짐해본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나만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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